홍종표 전국공공운수노조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지부장이 지난 11일 낮 대구 동구에 있는 가스공사 직원식당 앞에서 직접 고용을 촉구하는 선전전을 하고 있다. 대구/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홍종표(54)씨는 정규직을 약속받고 임시직으로 입사했다. 지난 1995년 서울 강서구에 있는 한국가스공사 자회사 한국가스기술공업(가스기공)에 들어가 가스관로 순찰 업무를 맡았다. 당시 부장은 “늦어도 한 달 내로는 정규직이 된다”고 약속했다. 2인1조나 3인1조로 근무했는데, 홍씨 외에는 모두 정규직이었다. 입사 다섯달 만에 고압가스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업무가 가스시설물 유지보수로 바뀌었다. 하지만 손에 잡힐 것 같던 정규직 기회는 오지 않았다.
지난 11일 낮 대구 동구에 있는 한국가스공사 구내식당 앞에서 만난 홍씨는 “쓰다 버려지고 이용만 당한 느낌이었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창피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버텼다”고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가스공사 정규직 직원들이 밥을 먹으러 왔다. 홍씨는 비정규직 동료들과 함께 “또다시 비정규직, 자회사 전환 반대한다”, “자회사는 또 다른 용역이다”라고 외쳤다.
전국공공운수노조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지부 조합원인 이들은 가스공사 본사에서 시설관리·미화·경비·전산·홍보 일을 한다. 하지만 소속은 가스공사가 아닌 30여개 용역회사로 나뉜다. 홍씨 등은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과정에서 새 자회사로 옮기라는 가스공사의 요구를 거부하는 중이다. 이들은 “(우리한테 똑같은 고임금을 달라는 게 아니라) 기존 정규직과 별도 직군, 별도 임금 방식으로 직접고용하면 정규직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며 기존 정규직과는 다른 처우를 하더라도 고용만은 가스공사가 직접 하라고 요구한다. 상시지속적인 업무는 직접고용이 원칙이라는 얘기다.
정부는 “자회사도 고용의 안정성은 확보됐다. 자회사 정규직도 정규직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로 정부는 공공기관에만 62개의 자회사가 만들어졌거나 설립을 추진 중인 상황을 수수방관하고 있다. 비정규지부장을 맡고 있는 홍씨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24년간 자회사에서 손자회사를 거쳐 현재의 민간 용역회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뜻과 무관한 9번의 이적’을 경험한 그가 보기에 자회사의 고용 안정성 확보라는 정부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외환위기의 폭풍우가 거세게 불어닥친 1998년 3월, 홍씨의 소속은 자회사인 가스기공에서 가스공사 손자회사인 ‘청열’로 바뀌었다. 회사는 홍씨를 비롯한 20여명의 노동자한테 “가스공사 자회사인 가스기공에서 다른 자회사로 옮기는 것이다. 문제없다”고만 했다. 청열이 본사인 가스공사의 자회사가 아니라 가스기공의 자회사, 즉 손자회사였던 것을 홍씨는 최근에야 알게 됐다. 홍씨는 “아무도 기술력 중심의 가스기공과 인력공급형 회사인 청열을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린 패잔병이 된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 그가 구내식당 앞에서 ‘직접고용이 정답이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는 비정규지부 조합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가 마지못해 청열로 소속을 바꾸던 때 김대중 정부는 대대적인 공공부문 민영화를 단행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약속한 강도 높은 공공부문 구조조정 일환이었다. 민영화 바람은 홍씨를 결국 공공부문 문밖으로 밀어냈다. 정부는 홍씨 등 노동자들이 1년 전 옮긴 손자회사를 민영화 대상에 넣었다. 당시 대통령 직속 기획예산위원회는 1999년 3월 낸 보도자료에서 청열의 민영화에 대해 “98년 1차 공기업 민영화 계획 발표 이후 자회사 분리매각으로는 남해화학에 이은 두번째 성공 사례”로 꼽으며 “금년 중에 추진하기로 계획된 34개 자회사 민영화의 차질없는 추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발표했다. 노동자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평가였다. 홍씨는 이 과정에서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하루아침에 민간 용역회사 직원이 됐다.
공기업 손자회사에서 민간 용역으로 바뀐 회사 분위기는 살풍경하게 변했다. 임금은 20% 이상 깎였다. 직원 몇은 정리해고됐고, 몇몇은 제 발로 회사를 떠났다. 회사에 대한 소속감도 사라져갔다. “상황이 바뀌면 (손)자회사라도 언제든 용역회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체험한 과정은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았어요.” 조합원들을 바라보던 홍씨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대중 정부는 정권 말인 2002년 12월까지 포항제철 등 공기업 8개를 민영화하고, 청열과 포스코개발 등 자회사·손자회사 66개를 민영화하거나 통폐합했다. 공기업과 산하기관의 경우 1998년부터 2001년 사이에 6만2천여명(25%)의 인력을 감축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민영화 바람은 주춤했다. 하지만 이미 관성이 붙은 공공부문 외주화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2003년 정부의 첫 실태조사 때 3만8916명이던 공공부문 외주화 인원은 2006년엔 66.6% 증가한 6만4822명으로 늘었다. 이 인원은 공공부문을 ‘선진화’한다며 131개 공공기관 출자회사의 지분을 매각하거나 폐지·청산, 통폐합한 이명박 정부 후반기인 2011년엔 9만9643명, 공공부문을 ‘정상화’한다던 박근혜 정부 후반기인 2016년엔 12만5237명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홍씨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민간 회사로 옮긴 지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세월은 흘렀지만 홍씨는 매일 가스공사 본사로 출근한다. 시설관리 일을 변함없이 한다. 그리고 민간 용역회사 직원이라는 신분도 그대로다. 그새 소속회사는 8번이나 바뀌었다. 청열→국제흥업→보경실업→고암→C&S자산관리→새시개발→우성→맥서브→현장종합관리. 홍씨는 그동안 소방설비 기사, 소방설비 산업기사, 공조냉동기계 기능사 등의 자격증을 따는 등 나름의 전문성 확보를 위해 애썼다. 2014년엔 가스공사 본사가 경기도 분당에서 대구 혁신도시로 옮겨갈 때 온 가족을 데리고 대구로 거주지를 옮겼다.
홍종표씨가 지부장을 맡고 있는 전국공공운수노조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지부 조합원들이 지난 11일 낮 대구 동구에 있는 가스공사 직원식당 앞에서 직접 고용을 촉구하는 선전전을 하고 있다. 대구/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 2017년 5월12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행보로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아 내놓은 선언을 티브이로 지켜보던 홍씨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래전에 꺼져버린 정규직이라는 희망의 불씨가 대통령의 약속으로 22년 만에 그의 마음에서 다시금 타올랐다.
하지만 희망이 잿빛 절망으로 변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스공사는 소방 등 일부 직종 120여명만 직접고용하고 나머지 30여개 용역회사에 흩어진 노동자 1200여명한테는 “자회사로 가라”고 했다. 24년 전 자회사로 입사한 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10번째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자회사에서 손자회사를 거쳐 용역회사까지, 저는 본사와 정규직에서 계속 멀어지면서 끊임없이 고용불안에 시달려왔습니다. 제가 소속됐던 (손)자회사가 하루아침에 용역회사가 돼버리는 날벼락을 체험한 당사자로서 어떻게 자회사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정부는 “자회사도 용역회사에 지나지 않는다. 모기관과 계약에 실패하면 고용 안전판이 무너진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우려에 자회사의 고용 안정을 꾀하기 위한 조처를 내놨다. 모기관이 각종 용역업체를 선정할 때 다른 민간업체와 공개경쟁 입찰을 하지 않고 수의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지난해 7월 기획재정부 훈령을 개정했다.
이마저도 홍씨는 신뢰하기 어렵다. 18년 전인 2001년 3월 김대중 정부 기획예산처는 ‘공기업 자회사 정리방안’을 발표했다. 그 이유를 두고 “모기업과 자회사 간의 부당내부거래·수의계약 등 자회사의 부실경영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정부가 자회사 고용 안정을 위해 내건 ‘수의계약’이라는 발판이 언제 꺼져 자회사를 무너뜨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로비에서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이 있으니 직원들은 참석하세요.” 홍씨와의 인터뷰 도중 사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홍씨가 말했다. “우리는 가고 싶어도 못 갑니다. 같은 공간에서 일해도 우리는 ‘직원’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직원’이 될 때가 딱 한 번 있죠. 본사 회의장에서 외부인사가 강연 등 행사를 하러 올 때 모기관 직원들의 참석률이 저조하면 우리가 ‘직원’이 되어 투입돼요.”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지부는 지난 8일 자회사 전환을 거부하고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김규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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