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3일 경기도 양주의 한 건설폐기물 업체에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타이인 이주노동자 프레용 자이분의 아버지 분미 자이분이 25일 양주 소망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성탄절 기도회에서 프레용의 영정을 들고 있다.
양주의 한 건설폐기물 업체에서 일하던 프레용 자이분의 생전 모습. 유가족 제공.
타이(태국)인 프레용 자이분(33)은 1년6개월 전 한국에 온 뒤 시급을 받아본 일이 없다. 그의 노동은 도맷금으로 넘겨졌다. 월급 140만원에 수당 20만원. 월 90시간이 넘는 연장근로에 값을 쳐준 이는 없었다. 숨지고 나서야 한국인들은 그에게 시간당 값을 매기고 있다. 안치실 이용료 1시간에 8000원, 하루 19만2000원. 지난달 13일 아침 8시2분 경기도 양주의 한 건설폐기물 업체의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뒤,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병원 안치실에 누워 있는 프레용에게 청구되고 있는 돈이다.
한국에 온 뒤 프레용의 자리는 줄곧 컨베이어벨트 앞이었다. 종일 건축폐기물을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리고 또 내렸다.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주 6일 꼬박 일했다. 잔업이 있는 날에는 밤 8~9시까지 일했다. 2인1조로 일하지만 컨베이어벨트 앞엔 그 홀로 섰다.
사고가 난 날에도 7시에 출근해 작업을 시작했다. 그날, 프레용이 왜 컨베이어벨트에 끼이게 됐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다만 1년 전 태안화력발전소의 김용균이 그랬듯, 프레용도 홀로 컨베이어벨트를 지키며 업무에 쫓겼다는 사실만 추정할 따름이다. 공장 관리소장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러 온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흩어져서, 계속 일해. 핸드폰 하지 마. 빨리빨리. 빨리빨리.” 김용균이 숨진 뒤 고용노동부는 컨베이어벨트 작업장에 대한 전수조사를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행하지 않았다.
타이에서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영어에도 능통했던 프레용이 한국에 온 건 형 때문이었다. 프레용보다 2년 먼저 한국에 온 형은 종종 인터넷 전화를 걸어 “한국에 오면 140만원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대졸자라도 프레용은 타이에서 한달에 30만~40만원을 손에 쥐었다. 고향에서 홀로 농사를 짓던 아버지의 대출비용과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 병원비까지 부담하던 프레용은 “한국 가서 돈 벌어 오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한국에 왔다.
프레용은 회사가 얻어준 방 2개짜리 숙소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 9명과 함께 살았다. 좁은 방에 5명이 몸을 뉘었다. 취업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입국한 뒤 그는 늘 단속과 추방의 공포 속에 살았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은 “경찰을 피해다니라”고 말했다. 공장과 그 주변을 벗어날 수 없었다.
프레용은 ‘한국 사람들은 하지 않는 일이고, 등록된 외국인 노동자들조차 힘들어서 금방 도망가는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숨어 지내야 하는지’ 종종 답답했다. 그럴 땐 가장 싼 맥주 1.5리터를 한 통 사서 형과 나눠 마셨다. 형은 늘 “그래도 돈을 버니 조금만 더 참자”고 달랬다.
숨지기 전날, 프레용은 아버지 분미 자이분(69)과 통화했다. “추워서 조금 아프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힘들면 돌아오라”고 했다. 프레용은 “조금 더 돈을 벌어 고향에 카페를 차리겠다”고 말했다. 하루 뒤에 아버지 물미는 “프레용이 기계에 빨려들어갔다”는 큰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정신을 놓고 울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아들의 유골을 수습해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프레용의 아버지 물미는 지금 프레용이 남긴 겨울옷을 입고 낯선 땅에서 생애 첫 추위를 맞고 있다. 프레용이 회사에서 못 받은 최저임금 미달금은 1300만원에 이른다. 회사는 장례비를 내주었을 뿐이다. 그가 일했던 업체는 지난해 매출 132억원에 45억원의 이익을 냈다. 그 회사 컨베이어벨트에서 일하는 이들은 모두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올해 산재로 목숨을 잃은 이주노동자는 확인된 수만 135명에 이른다. 그러나 책임진 이는 없다. 프레용의 죽음에도 책임지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양주/글·사진 김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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