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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경계인’으로 세 나라 떠돈 기구한 삶 “탈북민 인정받는 데 10년 걸렸네요”

등록 2019-12-25 05:00수정 2019-12-25 08:05

대법원 “위장탈북 아니다” 무죄 확정
중국동포→북한인→탈북민→위장탈북 몰려→마침내 되찾은 한국국적

중국동포 어머니와 살다 북으로
26년만에 탈북, 목숨 건 중국행
우여곡절끝 2007년 한국 왔지만…

가족 데려오려 2010년 중국 갔다
브로커가 해준 ‘중국 호구부’에 발목
한국 여권과 국적 박탈당하고
검찰은 “위장 탈북” 기소까지

“그간 신분 불분명해 일도 못해
국적 찾았으니 다시 일어서야죠”
북한과 중국, 한국을 오가며 경계인의 삶을 살아온 박태형(가명·59)씨가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둔 지난 22일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태양을 바라보고 서 있다.
북한과 중국, 한국을 오가며 경계인의 삶을 살아온 박태형(가명·59)씨가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둔 지난 22일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태양을 바라보고 서 있다.

24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2호 법정. “상고 기각” 짧은 한마디가 재판정을 울리자, 박태형(가명·59)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곧 환하게 웃음지어 보였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이날 박태형의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 1심과 2심과 같은 판단을 내리고 무죄를 확정했다. 앞서 검찰은 2016년 7월 박태형이 탈북자로 위장해 2008년부터 2년 동안 각종 탈북민 지원금 약 480만원을 불법 수급한 혐의를 받는다며 기소했다. “중국 국적자임에도 불구하고 탈북자에게는 정착지원금이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듬해 탈북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자수해 지원금을 타냈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었다. “그러니까 탈북민으로 인정받는 데 10년이 걸렸네요.” 오랜 오명을 벗어던진 박태형이 나지막이 말했다. 2001년 북한에서 이탈해 2008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박태형에게 지난 10여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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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두 번의 탈북

2001년 8월, 평안북도 염주군 압록강 남쪽 하구에 있는 다사도. 요즘은 다사노동자구로 불리는 이 섬은 18년 전만 해도 중국과 북한 사이 밀수를 위해 거치는 섬이었다. 평북의 한 지하 갱도에 있는 공장에서 기계 부품 만드는 일을 하던 당시 41살 박태형은 “북한에서 도망쳐 중국으로 가겠다”는 마음 하나로 이 섬에 몰래 숨어들었다.

탈북을 결심하게 된 건 노동단련대에 끌려간 일이 계기가 됐다. 배가 고파 공장에서 부품 몇 개를 빼돌려 팔았다는 이유로 단련대에 끌려갔다. “거긴 아주 무섭고 힘든 데에요. 거의 죽어 나간다고. 단련대 입구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부터 몇 대 때리고선 그놈들이 그래요. ‘너는 이제 사람이 아니야, 짐승, 개야.’” 박태형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때를 돌아봤다. 혹독한 단련대 생활에서 박태형은 1개월 ‘형기’를 채우지 못하고 도망쳤다.

다사도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다사도에 숨어든 지 석달 만에 그곳에 사는 선장과 함께 배를 탔지만, 곧바로 북한 경비정에 붙잡혔다. “다시 다사도로 끌려가서 두들겨 맞고 물건 실어 나르는 트럭에 실려서 북으로 실려 갔죠.” 트럭이 데려갈 곳은 뻔했다. 다시 단련대였다. 박태형은 그래서 결심했다. 단련대 끌려가서 죽으나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다 싶었다. 그렇게 어딘지도 모르는 내리막길에서 뛰어내렸을 때, 박태형은 속도가 몹시 빨랐던 것만 기억날 뿐, 얼마나 어떻게 다쳤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잡히지 않기 위해 상처를 부여잡고 언덕 여러 개를 단숨에 뛰어 넘어 풀숲에 숨었다. 며칠이 걸렸는지도 모르게 걸어서 다사도로 돌아갔고, 이번에는 경비정에 걸리지 않고 중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2001년 11월이었다.

북한과 중국, 한국을 오가며 경계인의 삶을 살아온 박태형(가명·59)씨가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둔 지난 22일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하늘을 보며 서 있다.
북한과 중국, 한국을 오가며 경계인의 삶을 살아온 박태형(가명·59)씨가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둔 지난 22일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하늘을 보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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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호구부’가 빌미 된 불행

박태형은 중국 동포 어머니와 북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함께 중국에 건너갔고, 15살인 1975년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북한에 돌아갔다. “그때 가지고 있던 중국 여권과 관련 서류를 모두 국가안전보위부에 내고 사흘 만에 북한 공민증을 교부받았어요. 그 뒤로 쭉 북한 공민으로 살았죠.”

26년 만에 돌아온 중국에서 박태형은 돈을 벌고자 했다. 북에 남은 아내와 아들까지 세 가족이 먹고살 정도의 돈을 벌면 다시 북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신분이 불안정한 박태형에게 쉽게 일자리를 주는 곳은 없었다. 생활은 갈수록 쪼들렸고, 그렇게 어렵게 탈출한 곳을 빈손으로 돌아가기엔 “죽기보다 싫었다”는 박태형은, 브로커에게 돈을 주면 위조 중국인 여권을 만들어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어떻게든 벌어뒀던 200만원을 브로커에게 주고 “한국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이 나중에 탈이 될 줄은,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브로커는 박태형에게 위조 여권이 아니라 진짜 여권을 내밀었다. 호구부도 만들어줬다. 호구부는 한국의 호적등본 같은 것인데, 중국에서는 진학, 결혼, 여권 발행 등을 할 때 신분을 입증하는 서류로 호구부를 제출한다. 브로커가 어릴 때 중국에 산 박태형의 소실되지 않은 호구부를 갱신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 중국 호구부를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007년 12월 한국에 입국한 박태형은 경찰과 국가정보원 조사를 받은 뒤 북한이탈주민으로 인정받았다. 하나원 교육 과정도 수료했다. 2008년엔 한국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았고, 통일부의 보호 결정도 나왔다. 지원금을 받으면서 중장비학원에 다녔고, 일도 찾았다. 그리고 2년 뒤인 2010년 10월11일 박태형은 다시 중국에 건너갔다. 북한에 남아 있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다.

불행은 여기서 시작됐다. 중국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 그런데 입국심사를 받기도 전에 중국 공항 경찰이 박태형을 조사실로 끌고 갔다. 박태형의 출입국 기록을 검색하던 경찰이 박태형의 호구부가 있음을 확인하고 “중국인인데 왜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느냐”, “혹시 탈북자인 것 아니냐”고 물었다. 박태형은 자신의 탈북을 인정하는 순간 바로 북송되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다. 살기 위한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은 까닭이다. “사실은 내가 중국 국적자인데, 한국에서 체류 기간이 도과해 돈을 주고 한국인 이름으로 된 여권을 구입했다.” 박태형은 곧 중국 경찰에 한국 여권을 뺏겼고,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석방됐다. 석방 뒤 영사관에 연락했지만, 영사 역시 박태형의 중국 호구부만 확인하고선 박태형을 중국 국민이라고 판단해 한국 정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박태형의 국적과 통일부의 보호 결정은 모두 취소됐다.

박태형씨의 북한 공민증과 박씨가 한국에서 2010년 취득한 지게차운전기능사자격증.
박태형씨의 북한 공민증과 박씨가 한국에서 2010년 취득한 지게차운전기능사자격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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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없는 ‘경계인’의 삶

우여곡절 끝에 2015년 11월 한국에 돌아왔으나, 박태형이 얻었던 한국인으로서의 자격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국적은 상실됐고, 은행 거래도 불가했다. 뿐만 아니었다. 검찰은 그를 범법자로 판단하고 기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박태형은 북한에서의 26년 삶을 입증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북한에서 찍은 가족사진, 북한에 있던 아들이 ‘옥수수 종이’(옥수수 껍질로 만든 종이)로 자신에게 쓴 편지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런데도 검찰은 끊임없이 “조작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태형의 변호인인 박원연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우리나라 국민의 지위에 있는 탈북민이 한국 외교당국에 도움을 구했으나 외교당국이 외면했다는 것이 본질”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 판결이 나왔어도 박태형의 삶은 당장 바뀔 게 없다. 현재 정부가 지원해준 46.3㎡(14평) 규모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국적 말소로 인해 2010년 이후 재계약을 하지 못해 임대료를 곱절로 내고 있다. 일용직 현장을 전전하다 보니 허리 보호대를 차고 다니지만, 병원에 간 적은 한 번도 없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10년의 세월을 도둑맞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박태형은 그러나, 이제는 다시 일어설 생각이라고 했다.

“10년 동안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신분이 불분명해 떳떳하게 다니지도 못했는데, 이제라도 한국 국적을 되찾아 정말 기뻐요. 아들한테 기대지 않고 앞으로 내 힘으로 당당하게 일을 하고 싶습니다.” 박태형이 2010년 딴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글·사진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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