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한겨레> 자료사진
“그룹 노사전략과 복수노조 대응태세 점검, 인사평가, 비상대응 시나리오… 노조를 와해시키고 고사화하겠다며 그 구체적인 수행방법까지 기재한 문건들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1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유영근)는 ‘삼성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삼성전자-삼성전자서비스-협력업체’로 이어지는 부당노동행위의 공모 관계를 인정하면서 삼성이 만든 문건 6천여건의 면면을 나열했다. 재판부는 이 문건을 토대로 삼성그룹 차원의 조직적 노조와해가 있었다고 보고, 삼성전자 및 삼성전자서비스 고위급 임원 5명에게 줄줄이 실형을 선고했다. 협력업체 노동자의 원청인 삼성전자서비스의 사용자 책임도 엄격히 물었다.
■ “미전실 주축으로 한 조직적 노조와해”
재판부는 “문건을 해석할 필요 없이 문건 자체로 범행 모의와 실행, 그리고 공모까지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했다. 2011년 6월 복수노조 도입을 앞두고 삼성그룹 미전실의 비노조 경영 방침에 따라 ‘노조가 설립되면 즉시 와해 전략을 구사하고 실패하더라도 지연 전략을 통해 고사화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삼성전자와 자회사인 삼성전자서비스가 이에 따라 복수노조 대응태세 점검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미전실에 보고했다고 본 것이다. 문건은 아이디어 차원으로, 윗선까지 보고되지 않았다는 변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전실이 고수한 ‘무노조 원칙’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 된다”고 했다는 이병철 창업주의 유지에 따라 80년 넘게 이어져왔다. 2011년 복수노조 제도가 시행되면서 ‘무노조 원칙’은 위기를 맞았지만 그린화 전략 등 그룹 차원의 광범위한 불법행위가 자행됐다.
■ “삼성전자서비스는 노조법상 사용자”
특히, 재판부가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원청인 삼성전자서비스의 책임을 물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재판부는 협력업체의 위장 폐업 혐의에는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삼성전자 및 삼성전자서비스 소속 피고인(임원)들은 다르다”고 봤다. 협력업체를 사실상 자신의 하부 조직처럼 운영했고 협력업체 노동자에게 실질적·구체적 지배력을 행사한 만큼, 원청인 삼성전자서비스가 노동조합법상 사용자에 해당된다고 본 것이다. 박다혜 변호사(금속노조법률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원청인 삼성전자서비스의 부당노동행위의 사용자성을 인정해 형사 사건에 적용한 최초의 판결”이라고 말했다. 2010년 대법원이 현대중공업의 하청업체 ‘기획 폐업’을 부당노동행위로 인정한 적이 있지만 이는 행정소송으로, ‘부당노동행위 구제명령’으로 이어졌을 뿐 원청업체에 ‘형사 책임’을 묻진 못했다.
■ “협력업체 노동자 불법파견 해당”
재판부는 또한 삼성전자서비스와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도급이 아닌 ‘파견’ 관계에 있다고 판단하면서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도 유죄로 판단했다. 이는 2013년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 결과와 2017년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결과를 뒤집는 것이다. 재판부는 협력업체가 처리하는 서비스 물량 98%가 삼성전자서비스의 사업인데다가 삼성 제품을 수리하는 업무 특성상 서비스 쪽 지휘·명령이 전제된 관계라며 “새로 발견된 상당한 증거들을 살펴볼 때, 삼성전자서비스와 협력업체 수리기사들은 근로자 파견 관계로 봐야 한다. 이것은 저희의 새로운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노동자들은 지난 1월 삼성전자서비스에 직고용돼 재판부의 판단이 노동자 지위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고한솔 장예지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