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내용으로 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과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100건이 넘는 법안이 본회의에 한번에 상정되는 경우가 많아 표결이 요식행위가 되기도 한다. 법안 처리율이 28%로 역대급으로 낮은 20대 국회는 ‘최악의 국회’로 비판받는다. 연합뉴스
누구나 새로운 길에 들어설 때는 꿈을 갖는다. 국회의원이 될 때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두가지 상황을 그려보게 된다. 일이 잘 풀려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낼 수 있다면 당연히 최대치의 목표를 바라볼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오랫동안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왔던 사법개혁, 검찰개혁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것이 그런 목표였다. 이상적인 모습의 사법제도를 설계할 수 있다면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이 잘 안 풀려서 최소한의 성과에 만족해야 하는 상황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처리율 6.75%, 초라한 성적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을 때 내가 생각했던 최소한의 성과는 모욕죄,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는 법안의 통과였다. (그때 생각으로는) 작은 목표였지만,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우리 정치를 형사절차에 종속시키는 법을 없앨 수 있다면 초선의원으로서 그래도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대치의 목표든 최소한의 목표든 공통점은 법안의 통과다. 법을 만들고 고치는 것이야말로 국회의원이 해야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총선이 6개월도 안 남은 20대 국회 임기 말. 최대한의 목표는커녕 최소한의 성과마저 달성이 요원하다. 모욕죄는 미투 국면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지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힌 상태다. 지금까지 우리 의원실에서 발의한 법안은 모두 76건. 그중에 40건 가까이가 사법개혁과 검찰개혁에 관한 내용이다. 나름대로는 좀더 진보적인 형태의 사법시스템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정성을 쏟아서 체계적으로 준비했지만 막상 의미 있는 내용이 들어간 법안들은 통과에 실패했다. 본회의까지 올라가서 최종적으로 입법이 된 것은 5건에 그친다. 처리율 6.75%의 초라한 성적표. 그나마 통과된 법안을 들여다보면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왜 이렇게 좋은 법을 만들기가 어려울까. 실제로 국회에서 이루어지는 입법 과정을 보자.
본회의장에서 법안에 대해 찬반 투표를 하는 것은 국회의원으로서 본질적인 임무를 다하는 엄숙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일, 예산을 심의하는 일 등 국회가 하는 일은 많지만 뭐니 뭐니 해도 국회는 입법기관이다. 법을 만들고 고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본회의를 통과하는 절차는 의외로 간단하고 때로는 지루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진행된다.
대개 한번의 본회의에서 표결하는 법안은 100건 내지 200건 정도다. 먼저 대여섯개씩 묶어서 해당 상임위원회의 의원 한명이 나와서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한다. 교육위원회 소속 의원이 연단에 나와서 교육에 관한 법안 몇개를 소개하는 식이다. 누가 발의했고 어떻게 수정이 되었는지 얘기한 다음 자세한 내용은 단말기의 자료를 확인하라고 한다.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우리 국회의 전자의정시스템은 법안마다 수십 내지 수백 쪽에 이르는 검토보고서를 의원들에게 제공하지만 읽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 읽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이미 상임위에서 여야 합의가 이루어져서 올라온 것들이기 때문에 의례적인 표결만 남았을 뿐 통과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회의에 올라온 법안이 투표에서 부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20대 국회에서는 딱 1건만 부결된 것으로 알고 있다(한국광물자원공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부결되었는데 한국광물공사의 자본금을 2조원에서 4조원으로 증액하는 내용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잘못된 투자에 대한 진상규명이나 처벌 없이 국민 세금으로 증자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홍영표 의원이 반대토론을 했고 결국 찬성 44인, 반대 102인, 기권 51인으로 부결되었다).
오히려 의원들은 법안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는 동안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잠깐 나가서 쉬는 경우가 많다. 법안 설명이 끝나면 바로 표결이 시작되는데 그때는 자기 자리에 붙어 앉아서 투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투표 절차는 이렇다. 국회의장 또는 부의장이 “다음은 ○○○법안을 의결하도록 하겠습니다. 투표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면 책상 위에 있는 단말기 화면에 찬성, 반대, 기권 버튼이 뜬다. 하나를 골라서 누르기가 무섭게, “투표 다 하셨습니까? 그럼 투표를 마치겠습니다”라는 의장의 말씀이 들린다.
본회의장 앞쪽에 있는 대형 전광판에는 의원 300명의 이름이 표시된다. 녹색 불이 들어오면 찬성, 붉은색 불이 들어오면 반대, 노란 불이 들어오면 기권 버튼을 눌렀다는 뜻이다. 회의에 불참하거나 투표를 하지 않은 의원의 이름은 하얀색으로 표시된다. 방청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나 티브이 화면을 통해서 투표 장면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어떤 의원이 찬성을 했고 어떤 의원이 반대를 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회의록에도 남아서 영구히 보존된다. 여야 합의가 되어서 본회의에 올라온 법안이지만 의원 개인의 소신에 따라서 반대표를 던지기도 한다.
표결 결과가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투표를 마치자마자 의장은 국회사무처 직원이 건네준 결과지를 보면서, “투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적 ○○○인, 찬성 ○○○인, 반대 ○○인, 기권 ○인으로 ○○○법안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라고 말하고 의사봉을 세번 내리친다. 하나의 법안이 통과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채 몇분이 되지 않는다. 서너시간이면 100건이 넘는 법안이 통과된다. 중요한 법안이 통과되는 때 티브이에서 본회의 장면을 중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승부는 그 훨씬 이전에 난다. 법안 발의 과정에서부터 차례로 보자.
상임위 넘어 법사위 첩첩산중
국회의원이 법안을 발의하려면 1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논란이 있는 법안은 여기서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20대 국회에서 가장 어렵게 10명을 모은 법안은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내용이 담긴 군형법을 개정하자는 내용의 법안. 정의당 김종대 의원이 대표발의를 했는데 공동발의에 참여할 의원 10명을 모으는 데 석달이 걸렸다고 한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법안이지만 정치적 부담이 되는 내용이면 발의부터 어렵다. 그에 비해서 단순히 문구를 고치거나 한자어로 된 조문을 우리말로 고치는 법안 등 별다른 내용이 없는 법안은 쉽게 다른 의원들의 서명을 받을 수 있다. 대표발의 건수는 실적이 되기 때문에 의원들 사이에 품앗이로 서로 서명을 해주기도 한다.
2018년 2월23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자유한국당 소속 권성동 위원장이 여야 합의가 되지 않은 법안을 상정하려 하자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간사가 항의하고 있다. 다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퇴장한 상태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일단 발의가 되면 법안과 관련이 있는 상임위의 심사를 받게 된다. 여기에서도 실제로 중요한 법안은 차별(?)을 받는다. 그런 법안은 여야 사이에 첨예한 찬반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반대 목소리가 높으면 당연히 상임위 통과가 어렵다. 상임위도 법안 통과 비율을 놓고 평가를 받기 때문에 다툼이 없는 법안을 먼저 심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 종일 논쟁을 벌이다가 한건도 처리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쉽게 통과할 수 있는 법안 10건을 심사 대상에 올리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상임위에서 법안을 심사할 때는 꼭 접수된 순서에 따르지 않는다. 여야 간사가 협의를 해서 나중에 발의된 법안을 먼저 처리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적이고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법안을 발의한 의원은 간사를 맡은 의원에게 그 법안을 심사 대상에 올려달라고 로비를 하기도 한다. 안 그러면 법안이 상임위에서 하염없이 잠잔다.
간신히 해당 상임위를 통과해도 끝이 아니다. 모든 법안은 그 내용에 상관없이 법사위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서로 다른 상임위에서 심사한 법안들의 내용이 들쭉날쭉해서 전체적으로 법체계에 맞지 않거나 혹은 법조문이 불명확한 것을 고쳐야 한다는 이유다. 흔히 ‘체계자구 심사’라고 한다. 그러나 조금 깊게 들여다보면 실제 법사위는 그런 형식적인 심사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까지 평가해서 법안 처리를 막기도 한다.
대체로 의석수가 가장 많은 원내 제1당은 국회의장을 배출하고 제2당 소속 의원이 법사위원장을 맡게 되기 때문에 법사위는 야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더구나 법사위는 다수결이 아니라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관행이 있다. 형식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법안이 의원 한두명의 반대에 부딪혀서 사장되기도 한다. 우리가 야당일 때도 무리하게 법안을 막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지금 야당을 무조건 비난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좋은 법안들이 법사위에 막혀 있는 것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20대 국회가 최악의 국회라고 비판하는 분이 많은데 그 중요한 논거로 등장하는 것이 법안 처리율이 낮다는 것이다. 18대 국회의 법안 처리율은 44%, 19대 국회의 법안 처리율은 41%인데 20대 국회의 법안 처리율은 28%다. ‘일 안 하는 국회’라고 욕하기 딱 좋다. 그러나 그 실질을 보면 꼭 그렇게 보기만은 어려운 측면이 있다. 18대 국회의 법안 발의 건수는 1만3000건, 20대 국회는 아직 6개월이 남았는데도 그 2배에 육박하는 2만2000건이다. 18대 국회에서 법안을 가장 많이 발의한 이명수 의원은 355건을 발의했는데, 20대 국회에서 가장 많은 법안을 발의한 황주홍 의원은 벌써 680건을 발의했다.
일단 법안 내고 보는 풍조에 시간·노력 분산
각 정당이나 시민단체가 대표발의 건수 등 양적 지표로 의원들을 평가하기 시작하니까 의원들이 별 내용도 없는 법안이라도 일단 내고 보는 풍조가 생겼다. 발의되는 법안 수가 급증하니까 처리율은 떨어지는 것이다. “잔임 기간”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임기 중 남은 기간”으로 변경하는 법안, 매년 4월11일을 ‘도시농업의 날’로 정하는 법안, 매년 9월7일을 ‘곤충의 날’로 정하는 법안이 꼭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법안을 심사하느라 정작 우리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는 법안에 투입되어야 할 시간과 노력이 분산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6개월이 있으면 20대 국회가 끝난다. 임기가 종료되면 그때까지 처리되지 못한 법안은 자동으로 폐기된다. 사형폐지법안처럼 매번 국회에 제출되고도 매번 폐기되는 중요한 법안도 있다. 차라리 심사를 해서 부결된다면 그에 대한 평가라도 따를 텐데 정면으로 부딪혀서 논쟁하지 않는 풍토는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임기 시작할 때 꿈꿨던 최소한의 목표라도 이루려면 지금부터라도 더 분발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