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과 고은 시인. <한겨레> 자료사진
자신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과 이를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고은(본명 고은태) 시인이 항소심에서도 패소했다.
8일 서울고법 민사13부(재판장 김용빈)는 고은 시인이 최영미 시인과 박진성 시인, 동아일보사와 기자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고은 시인의 항소를 기각했다. 최 시인 증언을 믿을만하다고 판단한 원심에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다.
최 시인은 2017년 말 문학잡지 <황해문화> 겨울호에 시 <괴물>을 발표해 문학계 원로의 성추행 의혹을 세상에 알렸다. 해당 시는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해 2월 동아일보사는 최 시인의 또 다른 제보를 바탕으로 ‘1992년 겨울에서 1994년 봄 사이 종로 탑골공원 근처 술집에서 고은 시인이 바지 지퍼를 열고 특정 부위를 만져달라 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작성해 배포했다. 고 시인은 최씨와 동아일보사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지난 2월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재판장 이상윤)는 최 시인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며 최 시인 쪽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최 시인 진술은 구체적이고 일관되지만, 고 시인이 제시한 증거는 이를 반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상황을 직접 목격했다는 진술이 있고, 이를 뒷받침할 최 시인의 일기도 증거로 제시됐다. 허위라 의심할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원로 문인인 고 시인의 성추행 의혹은 국민적 관심 대상이 되므로 보도의 공익성이 인정된다”며 언론 보도에 명예훼손 책임을 물기 어렵다고 봤다.
이날 재판이 끝난 뒤 최영미 시인은 “성추행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소송하더라도 건질 게 없다는 걸 보여줘서 통쾌하다”고 밝혔다. 최씨를 대리한 차미경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부회장)는 “고 시인 쪽이 항소심에서 새로운 주장이나 증거를 제출하지 않아서 1심과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대의명분에 비춰보더라도 질 수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