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송영순씨는 독재정권 시절 한국의 민주화운동 소식이 일본을 통해 세계에 전파되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85년 4월9일 서울 명동의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에서 송영순씨가 지학순 주교(가운데), 함세웅 신부(왼쪽)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송정빈 제공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폭압정치와 언론통제로 한국이 꽉 막혀 있을 때 민주화 투쟁에 관한 소식이 일본에서 펑펑 터졌다. 외신을 탄 뉴스는 독재정권에는 가장 큰 압박이었다.
일본에서 처음 발표된 시인 김지하의 양심선언(1975년 8월4일)이 대표적인 예다. 나이 들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언행 때문에 명성이 바래졌지만, 독재정권 시절 김지하는 투사 시인이었다. 김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있다가 나온 뒤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고 폭로하자, 박정희 정권은 그를 재구속(1975년 3월)한 뒤 고문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 그가 사형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팽배했다. 바로 그때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협의회의 소마 노부오 주교가 기자회견을 열어 “소위 ‘자필진술서’ 내용을 그들이 부르는 대로 낙서처럼 받아써가지고 내던져버렸던 것이다”라는 내용의 김지하 양심선언문을 발표했다. 김지하의 생명이 구해진 순간이었다.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위 간사
그 기자회견의 처음과 끝에 재일동포 실업가인 송영순(1930~2004)이 있었다. 미국의 제임스 시노트 신부를 통해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협의회에 전달된 것으로 입을 맞췄지만, 김정남이 기획한 양심선언문은 실제로는 콜레트(한국명 노정혜) 수녀와 왜관수도원장(아빠스)을 지낸 오도 하스(한국명 오도환) 선교사의 손을 거쳐 곧바로 송영순에게 전달됐다. 송영순은 양심선언문을 일본어로 옮겼으며 영어 번역도 준비했다.
이처럼 송영순은 1970년대 초부터 한국 민주화운동의 ‘대외 비밀창구’였다. 김정남이 서울에서 보내는 각종 민주화 투쟁 자료를 받아서 일본 신문 등에 배포하거나 때로는 미국에 보내기도 했다. 김지하 구명운동을 전세계로 확산시킨 작품집 <불귀>(1975), 전태일 평전의 일본어판 <불꽃이여 나를 둘러싸라>(1978)도 그가 직접 묶거나 출간을 주선했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한 5권짜리 영문 자료집 <양심선언―한국 가톨릭교회와 인권>(1983)을 미국에서 발간한 것도 송영순이었다. 또 1979년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의 육성녹음, 1980년 광주항쟁의 사진과 기록도 그가 전세계로 전파했다. 일본의 진보성향 월간지 <세카이>(세계)에 연재됐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의 주요한 정보 제공자기도 했다.
“만약 송영순 선생이 안 계셨더라면 한국 민주화는 훨씬 더 늦어졌을 겁니다. 숨어서 일을 하긴 했지만, 그의 역할이 너무 안 알려져 있어요.”(김정남, <한겨레> 인터뷰)
16살이던 1946년 형을 찾아 일본에 건너간 송영순은 고학으로 대학(리쓰메이칸대)과 대학원(메이지대)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했다. 고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재일한국인산업기술연구회(1960년)를 만든 데 이어 한-일 국교 정상화 직후 한국의 전력개발 산업(신한애자주식회사)에 투자했다. 사업을 통해 정경유착과 정치권의 부패를 경험하면서 민주화 필요성을 절감했다. 김수환(2009년 작고)과 외가 쪽 친척(장모가 김 추기경과 사촌)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김 추기경과 지학순(1993년 작고) 주교 등과 가깝게 지냈다.
“김 추기경이나 지 주교님이 일본에 오면 우리 집에서 머물곤 했어요. 아버지는 이분들을 존경했고요. 한번은 지 주교님이 시노트 신부님과 같이 자고 가셨는데 며칠 뒤 지 주교님이 구속(1974년)됐다는 뉴스를 봤어요. 깜짝 놀랐죠.”(송영순 아들 정빈, 9월18일 <한겨레> 통화)
당시 귀국하는 지 주교를 일본 공항까지 배웅했던 송영순은 이때부터 한국 민주화운동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시라야나기 세이이치 대주교가 이끄는 일본 가톨릭은 한국 가톨릭을 지원하기 위해 그에게 정의평화위원회 간사를 맡겼다. 그의 민주화 활동을 한국 정보기관이 파악하는 바람에 송영순은 독재정권 시절 오랫동안 귀국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사업 투자금 상당액을 잃었다. 송영순은 2004년 서울 평창동의 원룸에서 갑작스레 숨졌다.
2002년 8월20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국외 민주화운동 공로자들을 초청해 감사를 표한 자리에서 재일동포 송영순씨와 악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에 더 소중한 자료”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저한테 한국에서 온 자료를 주면서 문방구에 복사 심부름을 자주 시켰어요. 꼭 2부 또는 3부를 주문했어요. 한번은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내가 만일 무슨 일이 생겨도 이들 소중한 서류는 살아 있어야 한다. 나랑 같은 서류를 가지는 사람이 한분 있고, 한부는 여기에 보관할 것’이라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에 있는 사무실 캐비닛을 처음 열어봤는데 편지 등 민주화운동 자료들이 가득했어요. 아버지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셨던 김정남 선생님께 다 보냈어요. 한국에서 더 소중하게 쓰여야 할 것 같아서요.”(송정빈)
한국 전문가인 도쿄대 와다 하루키 교수는 197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 자료를 일본어로 옮기는 일을 도우면서 송영순과 친해져 호형호제했다. 송영순의 장례미사에서 와다 하루키는 “1974년 이래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위해 훌륭하게 싸웠다. 그 싸움을 일본에, 또 세계 여론에 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송영순씨도 진실로 (한국) 인물현대사의 주역의 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1974년 7월6일 도쿄의 일본 가톨릭 대주교관에서 지학순 주교(오른쪽)과 송영순씨. 이날 귀국한 지 주교는 김포공항에서 바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한겨레> 자료사진
천주교 신자인 송영순 바오로는 민주화운동을 돕는 한국 가톨릭 신부들을 존경했다. 사진은 1970년대 후반 일본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가운데)과 함께한 송영순·김애자씨 부부.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