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임정은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운영위원이 발언하고 있다.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제공
ㄱ(16)군은 어렸을 때부터 조립하는 걸 좋아했다. 컴퓨터 내부를 뜯어 복잡한 회로를 들여다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언젠가 내 손으로 컴퓨터 회로를 만들어보겠다는 꿈이 있었다. ㄱ군이 특성화고등학교인 경기도 ㄴ고교에 진학한 이유다. 처음 납땜 수업에 들어갔을 때 ㄱ군은 꿈을 향한 첫발을 떼는 것 같아 두근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납땜 수업은 몇달 만에 ‘고통’으로 변했다. 납땜 작업 실습 수업은 2주에 한번 3시간씩 이뤄지는데 학교는 마스크와 보호안경 등 안전도구를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잔뜩 먼지가 낀 환풍기는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실습을 하다 보면 눈이 따갑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납땜 가루 같은 게 코로 들어가 검은색 콧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 선생님에게 고통을 호소해도 돌아오는 건 “선배 중 죽은 놈 한명도 없어!”라는 호통뿐이었다.
그렇다고 납땜을 쉬엄쉬엄할 수도 없다. 제한시간 안에 실습을 완료하지 못하면 점수가 깎인다. ㄱ군을 비롯한 ㄴ고 학생들은 납땜 수업이 끝나면 머리가 아파서 쉬는 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있다고 한다. “그나마 1학년인 지금은 사정이 나은 편이에요. 지금은 2주에 한번이지만 2학년이 되면 매주, 3학년이 되면 매일 납땜 수업이 예정돼 있습니다. 앞으로가 더 걱정돼요.” ㄱ군의 말이다.
보호장구 하나 없이 납땜 실습 수업을 하는 곳은 ㄴ고뿐만이 아니다. 특성화고 학생들이 모인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연합회)는 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 6월12일부터 10일 동안 전국 64개 학교의 학생과 졸업생 169명을 상대로 ‘전국 공업고등학교 학생들 실습실 사례 수합 및 마스크 지급 요구 서명운동’을 실시한 결과 전국의 여러 학교에서 납땜 실습 수업 때 마스크를 지급하지 않거나 환풍기를 가동하지 않는 사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합회가 취합한 사례를 보면, 경남 ㄷ공고에선 환풍기도 마스크도 없이 작은 창문만 열고 납땜 실습을 했다. 전남 ㄹ공고에는 환풍기가 있었지만 고장이 나 작동되지 않았고, 서울 ㅁ고에선 공기청정기가 있지만 얼굴로 날아오는 가루를 전혀 걸러내지 못하는 등의 문제점이 발견됐다. 이 밖에도 전국의 다수 특성화고 학생들이 납땜 연기와 가루에 노출된 상태에서 실습 수업을 하고 있다는 답변이 쏟아졌다.
마스크뿐 아니라 작업복과 장갑조차 없어서 납 파편에 화상을 입는 일도 생긴다. 기자회견에 참여한 경기도 ㄴ고의 ㅂ군(16)은 “실습실에는 항상 뜨거운 인두가 있다. 하지만 장갑을 주지 않아서 맨손으로 실습한다”며 “작업복도 없어서 교복을 입고 실습하는데, 납이 튀면 바로 교복에 구멍이 생긴다. 친구는 팔뚝에 납이 튀어 화상을 입기도 했다”고 말했다.
임정은 연합회 운영위원은 “납을 가열하면 ‘퓸’이라는 물질이 나온다. 금속 성분이 매우 많은 가스인 퓸에 장기간 노출되면 폐와 신경계통, 정신계통 등에 문제가 생겨 말이 어눌해지거나, 심하면 쓰러지고 마비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며 “단기간에 납 연기를 많이 마시게 되면 급성중독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임 운영위원은 이어 “납땜과 용접, 도장 실습에서 환기는 필수다. 환풍기가 반드시 제대로 가동되어야 한다”며 “실습에 맞는 방독마스크와 보안경 지급은 기본”이라고 덧붙였다.
연합회는 지난달 14일 교육부와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을 상대로 납땜과 용접 등 공업계고 실습 때 마스크 등 관련 장비를 학생들에게 지급하도록 하는 운영지침 등이 있는지, 직업계고 교내 실습실에서 실습할 때 학생들의 안전과 보건 관련 교육청 운영지침 등이 있는지, 학생의 안전과 보건을 위한 직업계고 실습실 장비와 시설 설치 및 실습실 설계, 필수 확보 물품(구급약 등)에 대한 교육청 운영지침 등이 있는지, 직업계고 교내 실습 관련 학생들의 안전 및 보건을 위한 교육청의 현장 점검과 학교 실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현장 점검과 실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그 결과 교육청은 대부분 ‘실습실 안전 관련 매뉴얼이 존재하고, 안전점검도 실시하고 있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이상현 연합회 이사장은 “연합회가 제보를 받은 현실은 이런 교육청 답변과 달리 마스크 없이 납땜하며 연기에 노출되고, 환풍기가 없거나 있어도 가동되지 않고 있었다. 교육부·교육청의 안전 계획이나 점검이 얼마나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합회는 “학생들의 안전과 건강이 위협받는 실습실 문제를 당장 해결해야 한다”며 “지금 당장 모든 특성화고 실습실에 마스크를 지급하고, 환풍기를 설치해 가동하라”고 요구했다. 또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에 특성화고 실습실 실태조사 및 실습실 안전과 관련한 실질적인 계획 수립을 촉구했다. 연합회는 “다음주 중으로 서울지역 특성화고 실습실에 대해 자체 실태조사를 하고, 이후 지역 교육청과 지역 공업고등학교를 방문해 교장과 교감을 면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주빈 기자
ye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