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가 최근 개인과 사회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정도의 게임 과몰입을 ‘게임이용장애’라는 질병으로 분류했다. 국내에서 게임이용장애의 질병 지정이 추진되면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은 국내 게임 이용자가 한 피시방에서 온라인 게임을 즐기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개인과 사회생활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정도로 게임에 빠져드는 게임중독을 정식진단명(‘게임이용장애’)으로 지정하는 것을 두고서 의료계와 게임계가 맞서고 있다. 심각한 상태인 게임이용장애를 체계적으로 진료해야 한다는 찬성 목소리와,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킬 것이라는 반대 목소리를 함께 들어보았다.
지난달 28일 세계보건기구(WHO)가 흔히 ‘게임중독’으로 불리는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를 정식 진단명으로 채택하는 새로운 국제질병분류(ICD-11)를 의결하면서, 국내에서도 게임계와 의료계의 찬반 논란이 달아오르고 있다. 세계보건기구 의결을 반영해 국내에서도 게임이용장애를 한국표준질병분류(KCD) 안의 질병코드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질병코드는 특정 질병에 매겨지는 고유 식별 표기를 말하는데, 모든 의료 관련 기관에서 쓰여 주로 질병의 관리와 통계에 활용된다. 예를 들면 ‘인플루엔자 및 폐렴’은 ‘J09-J18’로 표기된다.
게임업계와 개발자단체들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질병코드 지정이 게임 자체를 잠재적인 질병 유발 요인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반면 정신의학자를 중심으로 한 의료계와 여러 시민단체는 게임중독에 따른 건강문제를 예방하고 관리하는 데 필요하다며 세계보건기구의 결정과 후속 질병코드 지정을 지지하고 있다.
“게임 때문에 병원 찾는 아이 많아”
‘게임이용장애’라는 진단명만 따로 없을 뿐이지 게임중독 진료는 의료계에서 이미 다뤄지고 있다. 10년 넘게 소아청소년 정신과 진료를 해온 백태영 메티스신경정신과 원장은 “우울증이나 주의력결핍과다행동장애(ADHD) 같은 다른 진단명으로 상담, 치료하고 있지만 사실상 게임이용장애 진료는 벌써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게임에 빠져 학교에 못 가거나 그만두는 청소년들이 있다. 상담해보면 학교에 가기 싫다는 게 아닌데도 의지와 달리 밤새 게임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한다. 부모와 몸싸움까지 벌이는 경우도 있고 경찰이 출동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로 병원을 찾아오는 아이들이 꽤 있다.”
게임이용장애는 우울증 같은 다른 ‘공존질환’이 있는 경우도 많다. 백 원장은 “우울증이 먼저인지 게임이용장애가 먼저인지를 분명히 나누기는 어렵다. 알코올 중독도 우울증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만 우울증이 치료된다고 알코올 중독이 저절로 없어지는 건 아니다. 서로 영향이 있기에 둘을 함께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게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고 심각한 병적 상태에 이르는 경우에 게임이용장애로 진단하고 치료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게임단체들의 ‘게임 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5월2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출범식을 열어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국내 게임계의 관점은 다르다. “많은 게임개발자가 게임 과몰입이 ‘질병’이라면 게임을 만드는 우리 개발자는 ‘질병 유발자’인가 묻고 있다. 재미를 추구하는 게임의 재미가 중독의 원인이란 건가?” 게임 개발 24년의 경력을 지닌 전석환 한국게임개발자협회 사업실장의 말이다. 한국게임학회, 게임산업계, 개발자단체와 대학 관련 학과 등 90개 단체가 참여한 ‘게임 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게임공대위)는 지난달 29일 출범해 질병코드 도입에 반대하는 장기적 대응에 나섰다. 이들은 게임을 놀이와 문화의 관점이 아니라 규제와 치료의 관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게임공대위는 앞으로 질병코드 지정에 반대하고 게임 문화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게임스파르타’ 프로젝트를 펼쳐나가기로 했다. 심재연 한국게임학회 상임이사는 “이미 게임 과몰입 문제를 다루는 치유센터들이 있는데도 이를 ‘질병’으로 지정해 다룰 필요까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게임문화재단이 만든 ‘게임과몰입힐링센터’는 현재 전국 다섯 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게임계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를 국내 게임산업의 자성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게임개발자연대의 김환민 사무국장은 “게임이용장애를 겪는 사례들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데도 이를 게임 사용자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게임에는 책임이 없다’ ‘게임이 마약이냐’라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게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게임이용장애를 유발할 만한 요소들을 게임업계가 먼저 찾아내고 줄이려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국내 온라인 게임을 보면 계속 접속하도록 하고 될수록 오래 게임을 하게 유도하는 여러 장치를 활용해왔다. 방학 기간에 ‘출석체크 이벤트’를 벌여 게임 아이템을 주거나 뽑기 식의 ‘확률형 게임 아이템’을 제공해 게임에서 쉽게 떠나지 못하게 한다. 한국 게임이 문화로 뿌리내리려면 문제점을 연구하고 조사해 게임의 부정적 요소들을 줄이려는 노력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왜 게임만 문제 삼냐고?
게임의 중독성 논란은 사실 해묵은 것이다. 2011년 청소년보호법 개정으로 ‘셧다운제’(청소년의 온라인 게임 접속시간을 제한)가 시행될 때도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2013년 이후엔 인터넷 게임 매출액의 일정액을 걷어 게임중독 치유 등에 쓰자는 ‘인터넷 게임중독 치유·지원에 관한 법안’이 이른바 ‘게임중독세’ 논란을 일으켰다. 알코올, 마약, 도박과 함께 게임을 4대 중독으로 지목한 ‘중독 예방·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안’도 갑론을박을 불렀다. 두 법안은 2016년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이번 질병코드 지정 논란은 게임에 대한 뿌리 깊은 부정적인 시선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라고 게임업계는 보고 있다. 심재연 이사는 “게임이 중독을 유발한다고 말하던 이들이 이번에는 질병코드 문제로 포장을 바꾸어 게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게임계에서는 충분한 연구가 쌓이지 않은 채로, 질병코드 지정 추진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재연 이사는 “학계에서도 게임이용장애의 진단기준에 대해 충분히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당연히 게임중독은 치료해야 하지만 중독이 게임 자체 때문에 생겨났다고 볼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동안 정신의학계 중심의 연구들이 게임의 장르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이뤄져 게임에 대한 오해가 커질 수 있다고도 우려했다. 윤태진 연세대 교수(커뮤니케이션대학원) 연구진은 지난해 11월 펴낸 ‘게임 과몰입 연구에 대한 메타분석 연구’ 보고서에서 “게임 과몰입·중독 연구가 병리적 현상을 유발하는 무엇으로 게임을 지칭하면서 연구 설계나 병인의 명명 과정에서 게임의 속성이나 분류에 대해 무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학술적 합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 혼란을 더욱 야기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그동안 충분한 근거가 쌓여왔다고 반박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의 타리크 야샤레비치 대변인은 <한겨레>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번 의결은 여러 증거를 검토해 이뤄졌다. 전문가 자문 과정에 다양한 분야가 참여했고 지역 전문가들의 합의도 반영했다. 오래전부터 학계와 병원들의 많은 임상 사례들이 보고됐다”라고 설명했다. 세계보건기구 자문활동을 해온 이해국 가톨릭대학 의대 교수(정신의학)는 신경과학 분야 연구들과 장기적인 추적 연구들이 이번 세계보건기구 의결의 ‘과학적 근거’가 됐다고 설명했다. “뇌에 쾌감을 주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기능이 알려진 게 1950년대인데, 도파민이 게임을 할 때도 분비된다는 게 1998년 뇌영상 연구에서 입증됐다. 게임은 중독 ‘물질’은 아니지만 행위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2013년 이후에 영국, 스위스 등 여러 나라에서 수천 명 대상의 추적조사가 이뤄졌고 여기에서도 지나친 게임 이용이 충동 조절 등의 기능을 떨어뜨린다는 결과가 보고됐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중독’의 의미가 과거보다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제시된 ‘게임이용장애’라는 진단명은 정신질환 진단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의 2013년 5차 개정판(DSM-5)의 분류 기준에서 비롯했다. 이 개정판에는 약물(마약)이나 알코올, 담배와 같은 ‘물질중독’과는 다른 ‘행위중독’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다. 이번에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국제질병분류의 행위중독에는 도박장애, 게임이용장애, 기타 이용장애 등 세가지가 제시됐다. 게임계 쪽에서는 “왜 게임 말고 쇼핑중독, 에스엔에스(SNS)중독 등은 문제삼지 않느냐”고 반박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기타 이용장애’가 따로 있다는 것은 쇼핑중독이나 에스엔에스중독 같은 것도 병적 상태에 이를 정도일 때에는 진단과 치료 대상에 포함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해국 교수는 “2013년 이후 게임중독에 관한 연구들이 많아지면서, 세 가지 진단기준(
표 참조)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됐다”고 말했다. ‘게임이용장애’로 진단을 받으려면 단순히 게임을 많이 하는 정도가 아니라 게임이용의 조절력을 상실, 생활에 장애가 될 정도 등 엄격한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의료-게임문화 간극 좁혀질까
게임이용장애에 질병코드가 부여된다고 해서, 의료현장에서 변화는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백태영 원장은 “이미 일선에서는 진료가 이뤄지고 있어 질병코드가 새로 생긴다고 해서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독자적인 진단명을 쓰면 게임이용장애의 관리와 통계가 체계화돼 의료와 공중보건의 정책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해국 교수는 “동네 의원이나 학교 상담실, 보건소 등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진단과 치료의 표준을 마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보건기구의 국제질병분류-11은 2022년 1월 발효된다. 회원국들에 공중보건 계획을 짜고 질병을 관리할 때 고려해야 하는 지침으로 제시하는 일종의 권고이기에, 회원국들은 국내 논의를 거쳐서 현지 상황에 걸맞은 진단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질병 분류 등재를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5년마다 갱신하는 한국표준질병분류(KCD)에 2025년 등재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국내 상황은 2025년까지 긴 여정을 예고하고 있다. 질병코드 지정을 주도하는 보건복지부와 의료계, 그리고 게임 문화·산업의 발전을 중시하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게임계가 찬반 두 진영으로 나뉘어 논란이 커질 태세다. 정부는 국무조정실 주관으로 민관협의체를 구성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복지부와 문화부 등 관계 부처와 게임업계, 의료계, 관계 전문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민관협의체를 만들어 관련 논의를 하자는 얘기다. 서영석 국무조정실 과장(사회복지정책관실)은 “현재 찬성과 반대, 그리고 중립 인사들이 동수로 참여하는 민관협의체 구성이 진행 중이며 이달 말이나 내달 초에 출범할 것”이라고 말했다. 찬반 주장의 근거를 확인하는 공동연구나 실태조사 등을 통해 게임 의료와 게임 문화 간의 간극이 좁혀지길 국무조정실 쪽은 기대하고 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