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성 변호사는 제주 4·3, 일제 강제동원,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등 국가폭력 관련 여러 사건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해마루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사회 모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 그것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재밌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우리는 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어떤 폭력은 눈에 보이고 어떤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폭력은 명백하지만 그 이유까지 명백하지는 않다. 폭력을 저지르는 주체는 언제 처음 다른 누군가에게 힘을 가하기로 마음먹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 또한 공포가 되는 건 매한가지다. 사회적 약자에게 가하는 무수한 폭력 속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때로는 안도한 스스로가 부끄러워 눈을 질끈 감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폭력에 대한 고민이 평화를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떤 행동이 삶에 각인될 때 그 사람의 인생에는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것을 정작 전환점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때는 ‘그때의 나’가 있을 뿐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것이 시시각각 바뀌기도 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다. 그사이 예상치 못한 일에 몸담기도 하고 애써 바라던 꿈이 희미해졌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는 것이다. 아, 나는 여기까지 오려고 저 많은 장소를 거쳤구나. 저 많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겠구나. 학교 공부를 뒷전에 두고 사회운동에 눈을 뜬 것도, 평소에 크게 관심 갖지 않았던 영역이 내 일상 깊숙이 들어온 것도, 삶의 이유가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깨달은 것도 이 때문이었구나. 원래의 꿈을 수정한 게 아니라 내 꿈을 더 정확하게 발견하는 방식으로 한발 한발 나아간 것이었구나. 나는 여기에 오기 위해 매 순간 내 신념을 벼리어왔구나.
변호사 임재성(39)은 ‘평화운동가’를 꿈꾼다. 종교 이외의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해 복역을 했고, 지금은 국가폭력이 일그러뜨린 삶의 궤적을 되짚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 사건, 제주 4·3 사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이 그가 현재 맡고 있는 국가폭력 관련 소송들이다. 무엇이 그를 처음 평화에 발 들이게, 눈뜨게 하였을까. 왜 어떤 신념은 평생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 되었을까.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법무법인 해마루에서 임재성을 만났다.
나쁜 일 한 만큼 벌받으면 된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요?
“월급쟁이라서 변호사로서 소송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매주 배당되는 새로운 사건이 한두건 되니 대략 60건 정도의 사건이 동시에 돌아가요. 재판 출석도 거의 매일 있고요. 요즘 언론에서 저를 주목하는 것은 일제 강제동원 사건, 제주 4·3 사건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공익 사건들을 맡고 싶어 변호사가 되긴 했는데 전체 업무량을 따져보면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진 않아요.”
지난 5년간 ‘월급쟁이 변호사’로 살아온 그는 성추행으로 기소된 사람을 변호하기도 하고, 성추행 피해자를 대리해 고소하기도 한다. 전업 공익변호사로서 살아가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변호사들이라도 대부분 그렇게 살아간다.
―일반 사건에서도 보람을 느끼나요?
“당연하죠. 어떤 사건이든 누군가에게는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기에 중요하고, 저에게도 그러합니다. 나쁜 짓을 한 사람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한 만큼만 벌을 받으면 됩니다. 반면 공익 사건은 이기거나 지는 것에 상관없이 잘해야 하는 사건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건들은 보통 밤 10시 넘어서 착수하죠.”
―그때가 집중이 잘되나요?
“일단 사무실에서 제게 배당해준 사건들을 먼저 해놔야죠. 월급쟁이니까요.”
1999년에 대학에 입학한 임재성은 법학을 전공했다. 당시에는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사법시험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것은 학생운동이었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었고, 학생운동을 하다 평화운동에 눈을 뜬 것도 이때였다. 졸업 뒤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고 1년6개월간 복역했다. 여호와의 증인 외에 종교적 신념 외의 이유로 병역거부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때였다.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요?
“2001년 9·11 테러 이후에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잖아요.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고 이란, 이라크, 북한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다는 선언이잖아요. 테러와의 전쟁 속에서, 특히 2003년 이라크전쟁 시기에 대부분의 학생운동 그룹이 반전평화, 파병 반대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저도 전쟁 반대에 대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관련 운동에 대해 공부하며 졸업 뒤에 평화운동을 하는 활동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 파병 반대 운동과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에 참여하면서, 군입대를 앞둔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매일같이 질문할 수밖에 없었죠.”
2004년 12월에 임재성은 병역거부이유서를 작성한다. 그 글의 도입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언제까지 총으로 살인을 연습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진 젊은이들이 감옥에 가야 합니까. 왜 유엔을 비롯한 수많은 국제단체의 권고안을 무시하고, 외국의 사례에서도 전혀 부작용이 없는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제 개선에 대해서 깊은 고민도 없이 ‘한국의 특수성’만을 이야기할 것입니까. 이 아픔은 빨리 끝나야 합니다.”
―당시 부모님과의 갈등도 상당했을 것 같아요.
“감옥 가는 날, 마루에서 인사를 드렸는데 어머니가 차마 나와 보지도 못하셨습니다. 처음으로 접견을 오셨을 때는 접견실에 들어오지도 못하셨어요. 밖에서 얼핏 보시고는 수의를 입은 제 모습에 복도에서 오열하다 돌아가셨지요. 그런데 한번 그렇게 ‘내 자식이 여기 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시고 나니 매일 오셨어요. 다른 사람과 겹치면 접견을 못 하는 날도 있었는데 상관없다면서요. 몇개월이 지나고 어머니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이제는 법을 바꾸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지난해 6월28일,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5조에 대해 헌법불합치를 결정했다. 대체복무제를 병역의 한 종류로 규정하지 않아 신앙이나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임재성은 2015년부터 이 변론에 참여했다.
―헌재 결정이 나왔을 때 예전 기억과 맞물리면서 어떤 벅참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드디어 끝났구나 싶었죠.”
―그런데 아직도 완벽하게 정리된 건 아니죠?
“그때는 정말 기뻤는데 지나고 나니 아주 좁은 틈을 연 것이더라고요.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틈.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시골에서 온 한 남자가 ‘법’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지기가 가로막죠. 나를 지나가도 더 큰 문지기가 있을 거라고 말해요. 아예 닫혀 있었던 문을 열리게 한 건 맞는데, 앞으로도 여러 개의 문이 나올 거예요. 제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지지부진할 것이고 심사하는 과정은 모욕적일 테니까요.”
―현재 대체복무 논의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형평성 있는 대체복무’라는 프레임을 깨지 못하고 있어요. 그 형평성을 이유로 또 다른 징벌을 만들려는 게 문제이지요. 복무 기간을 보면, 처음에 나온 게 합숙으로 현역의 두배였어요. 제가 국방부 대체복무 자문위원회에 들어가서 말했어요. ‘사법적으로 처벌하지 말라고 했더니 이젠 입법적으로 처벌하려고 하는 것 같다. 감옥에는 못 보내는데 또 다른 방식으로 처벌하려는 것 아니냐. 어느 나라가 대체복무제를 두배로 하느냐.’ 그랬더니 공중보건의가 지금 이렇게 한다는 거예요.”
―공중보건의는 출퇴근하는 거잖아요. 경력도 인정되고 월급도 더 많고요.
“최고법원에선 이겼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 병역거부에 대한 적대감이 큰 거지요. 헌재가 법을 만들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법을 만드는 셈이죠. 복무 장소도 문제인데 정부안은 감옥이 유일해요. ‘얘네 원래 감옥 가서 계속 일했었는데 대체복무도 그냥 감옥으로 계속 보내면 좋지 않을까’란 단순한 생각에서 기인한 거죠. 어떤 영역에서 복무하는 게 사회적으로 이익일까라는 논의는 없고, 힘들고 어려운 일만 고민합니다. 명백히 ‘증오의 법안’이라고 생각해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변호사들이 2017년 6월 베트남 현지를 방문해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에게 학살된 피해자 가족들과 면담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윗줄 오른쪽 둘째가 임재성 변호사. 임재성 제공
평화학 연구하다 ‘사람 잡는 법’에 관심
대학 졸업 뒤 임재성은 ‘전쟁 없는 세상’이라는 평화단체에서 상근 간사로 활동하다 병역거부를 이유로 1년6개월간 복역한 뒤 2006년 5월4일 출소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평화학과 전쟁 관련 서적을 읽으며, 자신과 같은 사람이 평화학을 ‘제대로’ 공부해보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국가 단위에서 무력충돌, 분쟁해결을 고민하는 국제정치적인 ‘평화’가 아니라, 한 사회의 군사주의 문화가 어떻게 전쟁을 만들어내는지 파악하는 연구 말이다. 그는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 과정을 밟다 로스쿨에 진학했다.
―변호사로의 궤도 수정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대학원 다니면서 전쟁과 학살을 공부하면서 법에 대한 고민이 커졌어요. 전쟁이나 학살이 ‘법’이란 방식을 통과해서 이뤄지더라고요. 박사 학위 논문도 처음에는 병역법과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의 관계였죠. 박사 수료를 할 즈음에 지도교수였던 정진성 서울대 교수님께서 학부에서 법학 전공을 했고 논문 주제도 법사회학이니 로스쿨에 가서 제대로 훈련을 받아보는 게 어떠냐고 조언해주셨어요. 저 역시 전문성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멋모르고 로스쿨에 갔는데 어느새 5년차 송무 변호사가 됐네요. 하지만 지금도 스스로를 평화학 연구자, 평화활동가라고 규정하고 싶고, 변호사로서 지금 수행하는 사건들도 그 맥락에 닿아 있다고 봅니다.”
―학살이 법으로 이뤄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진행하고 있는 제주 4·3 사건의 재심이 정확히 그렇죠. 1948~1949년 2530여명의 사람이 모두 내란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사형되거나 육지의 형무소로 끌려갑니다. 얼핏 보면 법 집행이지만 법의 탈을 쓴 처형이었지요. 군경과 토벌대는 수사라는 이름으로 고문과 불법구금을 자행했고요. 군인에게 적용하라고 만든 국방경비법 제32·33조에 의해 판결을 받은 사람 3만2천여명 중 90%가 민간인입니다. 사람 잡는 법이었죠.”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3일 미군정기에 발생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948년 12월, 1949년 6~7월 2530여명의 민간인을 군사재판으로 처형한 것은 제주 4·3 사건의 여러 ‘학살’ 중 하나다. 2015년 말 ‘제주 4·3 도민연대’에서 여러 과거사 사건을 수행해온 법무법인 해마루의 장완익 변호사를 찾아와 제주 4·3 사건 재심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장 변호사는 같은 사무실의 임재성에게 검토를 지시했고 그는 국가배상 사건으로 가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판결문도 없고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서 재심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배상’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표하며 “돈을 요청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죄를 받고 싶다”고 했다. 결국 재심으로 갔다.
―관련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나요?
“제주 4·3 군법회의는 판결문이 없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판결문만 우연히 없는 게 아니에요. 재판 절차가 다 엉망이었어요. 본인들도 그러세요. 갑자기 유치장에 있다가 끌려 나오니 100명, 200명씩 강당에 앉히더라. 앞에서 군인들이 뭐라고 한마디 하더니 다시 들어가라고 하더라. 형무소에 가니 갑자기 징역 1년, 징역 5년이라고 하더라.”
2017년 4월에 재심 청구를 했는데 10개월이 지나도 제주지방법원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임재성은 “생존해 계시는 피해자 열여덟분을 대리했는데, 이러다 이분들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지난해 2월부터 재판이 열렸다. 매달 한번씩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법정에 나와 고문과 불법구금을 1시간 넘게 증언했다.
“오계춘 할머니의 증언이 기억에 오래 남아요. 이분은 1948년 26살에 구금될 때 갓난아이를 데리고 있는 상태였어요. 재판을 받고 목포로 가는 배 안에서 아이가 굶어 죽었지요. 그 아이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뚫린 듯 아프다고 할머니께서 법정에서 통곡하셨어요. 우리가 흔히 과거사라고 하잖아요. 이건 아직 진행 중인 일인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이제 96살인데 지금도 가슴이 벌어지게 아픕니다. 죽도록, 그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살지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살았습니다.’ 장내가 숙연해졌죠.”
치매를 앓는 한명을 제외한 열일곱명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법정에 섰고 재판부의 분위기가 점차 바뀌었다. 지난 1월17일, 제주지법이 제주 4·3 사건 생존 수형인에 대해 공소 기각 판결을 내리며 70여년 만에 사실상 무죄로 판단했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이 판결은 확정됐다.
―배상소송을 이어서 하나요?
“네. 형사보상청구는 이미 접수했고요.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요. 국가배상청구는 지금 준비하고 있어요. 한분이 판결 난 지 2주 만에 돌아가셨고, 나머지 열여섯분의 증언을 다시 들었어요. 그동안 사람들이 묻지 않았던 도발적인 질문도 했어요. 복수하고 싶지 않으셨느냐고. 당시에는 너무 아파서 화도 나지 않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분들은 국가폭력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잖아요. 동시에 소송을 통해 자신의 명예회복을 하신 분들인데, 단순히 ‘국가의 탄압과 그 극복’ 서사가 아닌 한분 한분의 이야기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지난해 3월19일 제주 4·3 재심 청구 사건의 2회 심문기일에 출석하기 위해 제주지방법원을 찾은 변호사와 수형인들. 맨 왼쪽이 임재성 변호사. <한겨레> 자료사진
피해자에게 감정 이입은 쉽지만
국가폭력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국경을 뛰어넘는다. 제주 4·3 사건뿐 아니라 일제 강제동원 사건과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도 맡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 사건의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일본제철 주식회사(옛 신일철주금), 주식회사 후지코시,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 등 전범 기업들을 상대로 기업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해왔다. 한국에서 2000년부터 소송이 시작됐는데 20년이 다 돼가는 지난해 10월에야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우리나라 대법원의 승소 판결에도 불구하고, 강제동원에 책임이 있는 그 어떤 주체도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나 배상에 나서지 않는 현실은 여전하다.
―배상 판결이 확정됐는데도 지지부진하죠?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거의 주말마다 전화하세요. ‘나 죽기 전에 사과받고 싶다. 나이가 많아서 마음이 급하다’고. 근데 일본은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죠. (배상 책임이 있는) 기업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일본 정부는 판결을 이행할 수 없다, (대법원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지난해 11월에 변호인단과 한·일 시민단체 활동가가 도쿄 신일철주금 본사에 찾아갔는데 문전박대당했습니다. 결국 신일철주금과 후지코시의 한국 내 자산이 압류돼 있는데 그것을 강제 매각해 현금화해달라는 신청을 냈습니다.”
일제 강제동원 사건과는 반대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에선 한국이 가해국이다. 베트남 피해자를 대리하는 임재성은 우리 또한 과거에 저질렀던 가해의 역사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가해자로서 좀 더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내가 속한 국가가 피해 당사자일 때 감정 이입을 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국가가 가해 당사자일 경우 우리는 그 입장을 헤아리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폭력을 저질렀던 과거를 돌아봐야 앞으로 폭력을 가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지난해에 시민평화법정을 열었습니다.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을 모셔서 가해국의 책임을 묻는 모의법정을 진행한 건데요. 올해 들어서는 4월4일 청와대에 피해자 103명의 이름과 주소, 서명을 담은 청원서를 접수했습니다. 베트남 학살 피해자가 최초로 자신의 권리 행사를 한 거죠. 폭력에 대한 연구가 평화학이라면 지금은 폭력을 당한 사람들의 목소리 정도만 연구되는데 이제는 가해자에 대한 연구, 어떻게 폭력이 작동할 수 있었는지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평화란 가해자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용기라고 생각해요”라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겸허해지고 말았다. 두려움과 공포에 대해 한번 더 성찰해보면 내가 ‘당하는’ 것만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 생각만 하는 사람이나 국가는 사태를 예방한다는 미명하에 스스로 폭력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제공할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나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평화는 찾아온다. 나를 조심하게 된다.
국가는 흔히 거기에 사는 사람을 지키는 테두리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국가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어야 하는 자 역시 국가에 사는 사람이다. 사람을 지키는 국가가 역설적으로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국가를 공격하기도 한다. 그때 총을 메는 건 ‘나’로 사는 사람인가, ‘국가’를 위한 인적 자원인가.
강제징용 손해배상소송 원고 쪽 대리인 임재성(오른쪽 둘째)·김세은 변호사와 한·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지난해 11월12일 피해자들의 사진을 들고 일본 도쿄 신일철주금 본사로 향하고 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저는 계속 운동권이고 싶어요”
―변호사 임재성이 아니라 개인 임재성으로서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요?
“제가 워커홀릭이에요. 밤새워서 서면 다 내보내고 그 다음날 일정까지 무리 없이 수행하고 집에 갈 때 제일 좋아요.”
―왜 국가폭력 사건에 계속 끌리나요?
“글쎄요. 팔자인가 보다 생각 중입니다. 진짜입니다.”
임재성에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친구 신청을 한 뒤, 페이지에 적혀 있는 그의 프로필을 읽는다.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전쟁 없는 세상 회원, 민변 베트남전 진상 규명 태스크포스팀(TF) 간사, 한베평화재단 이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실행위원, 시민평화법정 관리자…. 어떤 직함은 그의 생계를 책임져줄 직업이고 어떤 것은 그의 정체성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이는 모두 사람을 위한 일, 평화를 위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계속해서 ‘운동권’이고 싶어요.”
―운동권이요?
“대학교 때 선배들을 잘못 만나서 운동권이 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선배들을 잘 만나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해요. 그때 얘기하고 가슴에 품은 것들을 지금 실천하며 사는 것 같아요.”
―운동권이 하는 일이 뭘까요?
“대학 다닐 때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떨어지고 낙선 연설을 했어요. 그때 ‘평생 사회주의자로, 평화주의자로 살아가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사회주의자의 정의가 다양한데, 제게는 그것이 지금 사는 사회가 갖는 모순에 대해 조금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 그것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는 일 정도예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재미있어요.”
―변화의 불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멋있습니다.
일이 많아서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그와 저녁을 먹었다. 초여름에 치킨을 먹으며 시원한 음료를 마시니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퇴근길에 우리가 원하는 것도 딱 이만큼의 행복이 아닐까. 그 행복을 사수하려면 평화롭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평화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 평화는 작게는 일상에서, 크게는 국가로부터 온다.
그는 내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에 소속된 변호사로서 일하고 밤에는 공익 사건을 위해 자발적으로 야근할 것이다. 밤 10시 이후에도 초롱초롱한 임재성의 눈빛을 보니 그의 신념은 지칠 줄 모르는 것 같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지난해 박사 학위까지 받은 것을 보면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르는 것 같다. 내가 나로서 일관되게 사는 일, 일견 단순해 보여도 가장 어려운 일을 임재성은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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