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장자연)은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에 관한 권한을 ‘갑’(기획사)에 일임하고, ‘을’은 연예활동 전반에 걸쳐 ‘갑’의 결정 및 지시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 을이 계약상 의무사항을 위반할 시에는 위약벌금 1억원과 (중략) 모든 경비를 1주일 이내에 현금으로 배상한다.”
27살의 배우 지망생 장자연씨는 2007년 10월6일 김종승 대표가 운영하던 기획사 ‘더컨텐츠엔터테인먼트’와 3년 전속계약을 맺었다. 배우로서의 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찍은 도장은 장씨에게 삶을 내려놓지 않으면 풀려날 수 없는 족쇄가 됐다. “내가 드라마 캐스팅에 칼을 쥐고 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드라마에 출연시켜줄 수 있으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김 대표의 강요 속에 연기 대신 ‘접대’에 동원돼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수많은 공범도 있었다.
장씨는 전속계약을 맺은 직후인 2007년 10월18일부터 투자사 대표 등에게 술접대를 해야 했다. 2008년 5월엔 김종승 대표, 드라마감독 정아무개씨와 타이에서 골프를 쳤는데, 장씨는 자신의 비용으로 아는 프로골퍼를 대동해야 했다. 하지만 정 감독이 수준 차이를 이유로 “재미없다”고 말한 뒤 김 대표는 ‘프로골퍼 항공료를 정산해주겠다’는 약속을 장씨가 사망할 때까지 10개월 동안 미뤘다. 명백한 ‘갑’의 횡포였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전속계약서 내용상 김종승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모든 연예활동’에 술접대 행위가 포함된다고 볼 수 없으나 김종승이 술접대 행위 역시 연예활동에 해당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업무적인 지시를 하였”다며 “사회경험이 많지 않은 장자연으로 하여금 술접대 지시를 어길 경우 전속계약서상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장씨는 2008년 6월19일 김 대표가 페트병으로 자신을 폭행했다며 “(접대를 거부하면) 반복되는 욕설과 구타를 견뎌야 했다”고 적었다. 그해 8월엔 한때 <조선일보> 기자였던 조희천씨로부터 룸살롱에서 강제추행까지 당했다. 검찰과거사위는 지난해 조씨 재수사를 권고했고, 검찰은 뒤늦게 그를 기소했다.
김종승 대표는 2009년 2월 드라마 촬영 중이던 장씨에게 ‘드라마 스케줄을 빼고 타이로 와서 영화감독을 접대하라’고 요구했다. 장씨가 거부하자 “오지 않으면 방송 분량도 다 빼버리고 지원도 끊겠다”는 협박이 되돌아왔다. 실제 김 대표는 이후 장씨가 타고 다니던 승합차를 팔아버렸다. 결국 장씨는 그해 2월28일 ‘을’로서 견뎌야 했던 비참한 삶을 기록한 문건을 작성하고, 일주일 뒤인 3월7일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연예인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그 이미지에 어울리는 품행을 유지해야 하며 무질서한 사생활이나 품위를 손상하는 행동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행위를 할 경우 계약 위반으로 간주.” 장씨는 자신의 계약서대로 살려 했다. 그리고 품위와 긍지를 해치는 이들에게 맞서 삶과의 계약을 깨는 길을 택했다.
김남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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