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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젊은 감독들 “이런 바닥에선 영화 못만들겠다”

등록 2005-02-04 10:30수정 2005-02-04 10:30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 <씨네21> 제공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 <씨네21> 제공
[이슈]“가장 큰 피해입은 관객들이 집단행동 나서야”

한국영화의 중흥기가 몇년째 이어지고 있다. 세계 영화인의 눈과 귀가 한국영화를 주목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에서 세계 유수의 영화제로 발돋움하고 있다. 한국의 영화감독과 남녀 배우들은 칸, 베를린, 베니스영화제 등 세계적 영화제에서 감독상, 작품상, 배우상을 석권하는 한편 세계 각국의 영화시장에서 한국영화와 함께 자신의 이름값을 높여가고 있다. 할리우드영화에 맞서 자국의 영화시장을 성공적으로 지켜내고 나아가 세계를 향해 자국의 영화를 수출하는 한국을 많은 문화선진국들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영화의 전성기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한국영화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날 선 사회성과 풍자성, 실험성이 깃든 작가주의로 한국영화의 지평을 넓혀온 영화감독들이 “이런 바닥에서는 영화 못 만들겠다”고 나선 것인다. 누구 때문에? 영화감독과 관객 머리 위에 올라서 있는 사법부 때문이다. <한겨레>는 법원의 <그 때 그 사람들> 일부장면 삭제 결정에 대해 젊은 감독들의 의견을 물었다. [편집자]

젊은 감독들 “법원이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 한 목소리 분노


“충격적이다. 법원이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 그것도 섹스나 폭력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근거도 명확치 않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것이라니, 영화의 사전심의가 다 물 건너간 일인 줄 알았는데…”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

“당혹스럽다. 군사정권 시절에나 있던 검열제도가 사라지고 등급심의라는 자율심의기구만 남아있는 상황에서 사법부가 검열의 잣대를 들이대다니 이해되질 않는다. 더구나 참여정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텔미썸씽>, <썸>의 장윤현 감독)

“말도 안 된다. 박지만씨의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은 이해한다 해도, 사법부가 임의대로 몇 장면 삭제하라고 한 것은 월권이다. ‘상영하라’ 혹은 ‘상영하지 말라’만 판단했어야 했다.”(<죽어도 좋아> 박진표 감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낸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일부 받아들여 지난달 31일 재판부가 <그 때 그 사람들>에 대해 다큐멘터리 요소가 있는 세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영화계가 한목소리로 분노하고 있다.

재판부가 삭제 명령을 내린 부분이 박 전 대통령이 여자와 술자리를 갖거나 일본가요를 즐기는 장면 등 박지만씨가 요청한 부분이 아닌데다, 블랙코미디영화의 풍자는 인정하면서도 다큐 장면의 삽입으로 관객들에게 허구가 아닌 실제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자의적으로 ‘가위’를 들이댔다는 점 때문이다.

비판적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봤던 젊은 감독들은 <그 때 그 사람들>에 대한 판결에 대해 강한 유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선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장윤현 감독), “역사적·정치적 소재를 다룬 가진 영화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봉준호 감독), “한국 영화계에 찬물을 끼얹었다”(박진표 감독) 등 힘들게 이뤄낸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봉준호·장윤현·박진표 감독은 지난 2일과 3일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90년대 후반 들어 검열제도가 사라져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찾아가는 상황에서 이번 결정은 우리 사회에서 이제는 보장받았다고 생각됐던 표현의 자유가 위태롭고 취약한 것이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며 “영화계뿐 아니라 관객들이 집단적으로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진표 감독은 특히 “역사적 사건이나 실존인물을 소재로 한 영화는 왜곡된 역사에 대한 진실규명과 재발견, 국민의 알권리 충족 등 사회적 순기능이 있었다”며 “시대착오적인 이번 판결이 영화의 순기능을 훼손시키는 단초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봉준호 “현실정치 일정 지분 가진 자의 입김 작용했을 것”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으로 널리 알려진 봉준호 감독은 “‘상영금지가처분 소송’ 신청에 대한 판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소송들이 줄을 이을 것”이라며 “영상물 등급문제 해결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시간을 뒤로 돌리게 됐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정치권 입김 의혹’에 대해 “근거는 미약하지만 짐작은 된다”며 <실미도>에 대한 상영금지소송을 기각했던 예를 들었다. 그는 또 “<실미도>나 〈공동경비구역 JSA〉의 경우 해당 영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상영금지를 요청하거나 집단적 의사를 표현했던 것에 반해 <그 때 그 사람들>은 재판장의 사견 하나로 영화가 훼손됐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 대한 최종 판단은 관객의 몫임에도, 이번 결정은 관객의 의식수준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영화를 먼저 봤다는 이유로 ‘이 부분은 보여줘도 되고, 이 부분은 안 된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관객인 만큼 집단적 의사표현 필요”

그는 향후 대응과 관련 “영화계 차원에서 집단적 서명운동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며 “이번 사건은 영화인뿐 아니라 관객들이 가장 큰 피해자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의사를 표현해 이런 판례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표현과 창작의 자유에 대해 그는 “감독 입장에서 훼손된 작품을 사람들에게 공개한다는 것은 찢어진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영화제작에 있어 표현과 창작의 자유,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감독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장윤현 “영화를 관객이 아닌 법원에 맡기는 나라가 어디 있나”

▲ <텔미썸씽>, <썸>의 장윤현 감독. <씨네21> 제공
“수년간 열심히 찍고 만들었던 작품(<그 때 그 사람들>)을 온전한 작품으로 보여주지 못한 것이 영화인으로서 죄송하다. 영화 안 이상한 장면(검은 화면 처리)을 보며 관객들도 왜 이런 상황이 오게 됐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장윤현 감독은 “<화씨9·11>만 해도 미국뿐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에서 상영됐고, 인터넷시대를 맞아 국민 모두가 자유롭게 발언하고 이야기하는데, 사법부는 오히려 군사독재시절로 회귀하고 있다”며 “사법부는 국민의 높은 의식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거나 무시했다”고 일침을 놨다.

그는 “사법부의 이번 판결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몸에 나쁜 유황을 사용했으니 예술이 아니다, 사진 위에 그림을 덧칠했으니 사진예술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며 “이 영화에 삽인된 다큐 장면은 하나의 소재로 활용된 것이므로, 영화의 한 부분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영화에 대한 판단을 관객이 아닌 법원에 맡기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이번 판결에는 판사 개인의 의사가 크게 반영된 듯한데, 전문가도 아닌 판사 개인이 어떻게 영화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번 판결로 인해 실존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는 전혀 만들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일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며 “배우가 연기해서 만들어낸 장면, 다큐 장면을 편집해서 내보낸 장면이 예술이 아니라는데, 누가 영화를 만들겠나”고 꼬집었다.

박진표 “법원의 월권행위, 시대착오적 발상”

▲ <죽어도 좋아> 박진표 감독. <씨네21> 제공
<죽어도 좋아>를 제작하며 등급심의 보류 논란을 겪은 박진표 감독은 사법부의 이번 판단이 시대착오적 발상이자 사법부의 판단 권한을 넘어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박지만씨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사법부의 판결은 이해할 수 없다”며 “사법부는 박지만씨의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일 건지 기각할 건지만 판단해야 했으나 권한을 넘어서 판단했으며, 창작자나 영화를 제작한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사법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그 때 그 사람들>을 재미있게 봤다. 박 전 대통령도 이 영화를 봤다면 ‘하하하~ 재미있네!’하고 넘어갔을 것 같다”며 “이 영화는 허구이고, 다큐로 삽입된 부분도 임 감독이 편집해서 영화 속에 삽입한 것이므로 전체적으로 허구에 속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창작자 역시 개봉됐을 때 미칠 파장이나 책임을 고려해 영화를 만든다. 영화제작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창작의 자유는 창작자에게 맡겨야 한다”며 “이번 결정이 영화라는 매체가 해왔던 사회적 순기능을 훼손하는 계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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