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공공기관에 설치된 ‘비상용 생리대’ 무료 자판기를 이용하는 모습. 서울시 제공
“만약 누군가 나에게 ‘축하한다’나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월경이 얼마나 당연하고, 부끄럽지 않은 일인지 설명해주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2차 성징이 ‘감춰야 하는 일’ 혹은 ‘여성이 되는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학교에서 죄책감 없이 생리대와 생리휴가를 요구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월경이 존중받는 환경에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활동가)
“중학교 입학하는 해의 3·1절 아침, 심한 복부 통증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그렇게 월경하는 몸이 됐다. 초경을 하며 예쁜 장미를 받았지만 대략 40년 동안 하게 될 월경과 생리용품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여성의 불편함과 고통을 누구나 겪는 아무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김경희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우리는 남성의 ‘월경하지 않는 몸’처럼 365일 동일한 속도와 효율성으로 ‘생산적으로’ 공부하고 일하고 연애해야 한다. 그렇게 ‘정상성’을 획득하며 ‘남성’처럼 되고 평등해진다며 여성으로서의 ‘몸’을 다그치게 된다.” (이안소영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
16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의회 제2대회의실에서 열린 ‘여성 청소년 생리대 보편지급 정책을 위한 토론회’. 사회 여러 곳에서 활동하는 여성 활동가들이 월경과 생리대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터부시하는 사회, 이 때문에 관련 교육과 복지까지 미흡해진 환경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토론회를 주관한 권수정 정의당 서울시의원은 “보편적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여성 청소년 대상 생리대 지원 사업을 정책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실질적 논의를 위해 토론회를 열었다”고 밝혔다.
토론 참가자들은 생리대 무상지급 이전에 우선 ‘월경’을 금기어로 간주하는 사회 분위기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월경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시된 사회 분위기가 생리대 무상지급에 대한 논의를 막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안소영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월경을 ‘딸기잼’ ‘딸기데이’ ‘그날’ ‘마법’ 등으로 표현한다”며 “이는 여성의 몸을 임신과 출산을 중심으로 다루는 가부장적 편견이 끈질기게 작동한 결과”라고 말했다. 김경희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도 “생리대를 빌릴 때 가방에서 주머니로, 주머니에서 주머니로 몰래 전달받는다. 매점에서 두 개씩 파는 생리대는 누가 봐도 생리대이지만 꼭 검정 봉투에 싸서 줬다. 이렇게 생리대를 구매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생리대를) 소득 기준을 두고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낙인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16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의회 제2대회의실에서 ‘여성 청소년 생리대 보편지급 정책을 위한 토론회’가 권수정 정의당 서울시의원의 주관으로 열렸다. 오연서 기자
생리대 무상지급이 전 세계적 추세라는 주장도 나왔다. 참가자들의 발언을 보면, 현재 미국 뉴욕시, 호주 시드니시, 스코틀랜드에서는 학교 등 공공기관에서 무료 생리대를 제공하고 있다. 킴 굴드 주한영국대사관 정치 서기관은 “영국에선 ‘생리 빈곤’이란 용어가 있다. 생리대를 포함해 생리용품에 대한 경제적 접근성이 떨어지는 계층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설명했다. 굴드 서기관은 이어 “(생리 빈곤 문제의 해결책의 일환으로) 지난해 10월 스코틀랜드 정부는 800만 달러 규모의 예산을 들여 초·중·고등 및 대학교의 여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생리용품을 지급하기로 했다. 지난 3월에는 영국 정부가 학교에서 무상으로 생리용품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며 “한국에서도 생리대를 무상 지급하는 조치나 조례의 시행뿐만 아니라 시행 후 제도를 평가하고 여성 청소년에게 여성 존엄성 등에 대해 교육하려는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2016년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거나 생리대 대신 신발 깔창을 사용했다는 저소득층 소녀의 사연을 소개한 이른바 ‘깔창 생리대 보도’ 이후 2017년 12월 ‘청소년 복지 지원법’ 개정을 통해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에게 생리대를 무상지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활동가는 “무상 생리대 지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기본권을 침해당하는 것은 단지 불쌍하다고 동정받을 일이 아니다. 여성 청소년이 겪는 빈곤의 문제에 대해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 여성 청소년에 대한 시혜적 태도가 아니라 그들의 주체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저소득 계층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 청소년에게 생리대를 무상으로 지급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실제로 경기도 여주시는 지난 2일 만 11살 이상 18살 이하의 관내 거주하는 모든 여성 청소년에게 보건위생용품 구입비 또는 이용권을 지원하는 조례를 의결했다고 밝혔다. 이는 그동안 저소득층 중심의 선별적 복지로 생리용품을 지급하거나 공공화장실이나 학교에 비상용으로 지급하는 정책을 넘어서 보편적 복지의 일환으로 생리용품을 지급하는 국내 첫 사례다. 구정훈 강동구청 행정안전국 교육청소년과 주무관은 “생리대 수급을 신청하면서 부끄러운 일이 아님에도 왠지 부끄러워하는 신청자들이 많았다. 생리대 보편지급이 이뤄진다면 부끄러움 때문에 신청을 주저해 혜택을 얻지 못했던 사례가 줄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 주무관은 이어 “소득과 연령 기준에 관계없이 관내 지역아동센터 아동들에게 생리대 무상지급을 결정하자 지원 대상자 수가 534명에서 708명으로 32% 증가했다. 생리대 보편지급이 이뤄진다면 이처럼 사각지대의 수요를 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오연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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