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집도, 농사도, 벚꽃맞이도…새까맣게 타버린 강원도의 봄날

등록 2019-04-05 14:54수정 2019-04-05 19:36

고성군 토성면 용촌리, 속초시 장천마을, 영랑호 리조트, 강릉 옥계마을 등
곳곳에서 강풍이 몰고 온 화재로 가정집과 리조트 등 피해 속출
5일 강원도 고성군 용촌리 꽃집민박에서 소방관과 가족들이 잔불 진화작업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5일 강원도 고성군 용촌리 꽃집민박에서 소방관과 가족들이 잔불 진화작업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저 멀리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시뻘건 불덩이가 펄쩍펄쩍 뛰어 순식간에 온 마을을 집어삼켰어요. 앞으로 살길이 막막합니다.”

5일 오전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1리에서 만난 라갑순(70)씨는 불에 타 폭삭 주저앉은 자신의 집을 보며 “집이 다 타버렸다”며 울먹였다. 라씨는 “불꽃이 날아와 집에 불이 붙는 걸 뻔히 보고도 몸만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피소에서 집 걱정에 밤새 발만 동동 구르며 한숨도 못 잤다. 아침 일찍 돌아와 보니 이렇게 됐다”고 탄식했다. 라씨가 28년째 살던 집은 산불로 하룻밤 사이 잿더미로 변했다. 마당엔 깨진 장독과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비닐하우스만 서 있는 등 화재 당시의 처참함이 묻어났다.

이날 오전 11시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에는 소방관과 군인들이 남은 불씨를 꺼트리기 위해 순찰하고 있었다. 고성과 속초 일대 화재로 주택 125채 정도가 소실된 가운데, 장천마을에서만 40여 가구 가운데 20가구 정도가 소실돼 피해가 가장 컸다. 마을에 들어와 있던 물류회사와 주류회사, 주류창고 등에는 무너진 건물에 의해 술병들이 깨져 널브러져 있었다.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에 사는 김정순의 불타버린 곡식 컨테이너 창고. 이주빈 기자.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에 사는 김정순의 불타버린 곡식 컨테이너 창고. 이주빈 기자.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의 한 물류회사 창고에 널브러져 있는 술병들. 이주빈 기자.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의 한 물류회사 창고에 널브러져 있는 술병들. 이주빈 기자.
마을에서 만난 김정순(74)씨는 50년 넘게 살던 집과 곡식을 저장하던 컨테이너가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고 했다. “50년 동안 그 집에서 아들 공부 가르치고 시집 장가보내고 컨테이너에는 농사지은 거 넣어놨는데 싹 다 탔어요. 쌀이고 뭐고 다 넣어놨는데 굶어 죽게 생겼네. 쌀이 없어요. 쌀이 다 탔어요.”

옆에 있던 김씨의 남편 엄기만(79)씨는 “도랑이 있고 산줄기가 끊어져서 불도 끊길 줄 알았는데 하늘에서 불덩이가 바람을 타고 확 날아와서 떨어지니까 불이 이쪽에도 붙어버리더라”라고 말했다.

장천마을 마을회관 경로당에서 만난 김아무개(72)씨는 “불에 탄 집들은 대부분 신축 건물보다는 목조 건물인데, 탄 집에는 삽자루 하나 호미자루 하나가 안 남았다. 안탄 집들도 그을음 냄새가 너무 심해서 다들 못 들어가고 마을회관 경로당에 모여 같이 밥을 해먹고 있다. 집이 탔으나 안 탔으나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서 자야 할 것 같다”며 “가슴이 덜덜덜 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한잠도 못 자서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불로 무너진 속초시 영랑호 리조트 창고 건물. 오연서 기자.
불로 무너진 속초시 영랑호 리조트 창고 건물. 오연서 기자.
속초시 동북쪽에 있는 영랑호 리조트 인근 펜션들도 피해가 컸다. 영랑호 리조트는 철제로 된 창고 2개 동이 모두 불에 타 무너져 내렸다. 철제 구조물만 구겨진 채 앙상했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어서 성수기인 신세계 영랑호 리조트에는 예약 취소 문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신세계 영랑호 리조트 관계자는 “4일 밤 객실 50개 정도 손님들이 대피했다. 4일 이용자들부터 환불을 해주는 중”이라며 “전체 261개 객실 가운데 5일 예약이 100개 실이고, 토요일인 6일 예약은 만실인데, 연기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속초시 속초고등학교 인근 주택의 모습. 오연서 기자.
속초시 속초고등학교 인근 주택의 모습. 오연서 기자.
영랑호 북동쪽에 있는 속초고등학교 인근 주택들도 새까맣게 불에 탄 곳이 여럿 눈에 띄었다. 아직 잔불이 남은 듯 무너진 주택 자리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곳에 동생 가족이 살았다는 김장복(57)씨는 “동생과 함께 사는 82살 어머니가 틀니도 못 가지고 나올 정도로 급히 대피했다”며 “여러 군데서 불이 나면서 소방서들이 아파트에만 가고 주택이 모여 있는 이 동네는 그냥 포기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이 직접 호스를 들고 불을 껐다는 증언도 나왔다. 영랑호 리조트 남서쪽에 있는 보람아파트에 산다는 김아무개(52)씨는 “남편과 아들이 호스를 들고 나가서 불을 끄고 5일 새벽 3시에 들어왔다”며 “아파트 야산 불을 경비 아저씨와 주민들이 나서서 껐다”고 말했다.

강릉시 옥계면 옥계중학교 도서관의 에어컨 실외기가 불에 타 녹아내렸다. 이정규 기자.
강릉시 옥계면 옥계중학교 도서관의 에어컨 실외기가 불에 타 녹아내렸다. 이정규 기자.
강릉시 옥계면도 강한 바람을 타고 온 불로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학생 42명 규모의 작은 학교인 옥계면 옥계중학교에도 인근 남양리에서 접근하기 시작한 불이 돌진해오면서 특수반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실 밖 데크 난간에 붙자 5일 0시30분께 교직원 19명이 달려와 고무호스로 물을 뿌리며 불길이 번지는 걸 막았다. 하지만 옥계중에서 음악실로 사용하는 도서관 건물에 불이 옮겨붙어 에어컨 실외기 2대가 소실되고, 유리창도 5장 정도 깨졌다. 교실 앞 화단도 모두 탔고, 야외 스탠드, 골프연습장 천장망도 검게 변하거나 주저앉았다. 이 학교 관사에서 산다는 시설 담당 관계자는 “화단과 본관에 불이 옮겨붙을까 봐 집중적으로 물을 뿌렸다”며 “겁이 나고 무서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새벽이라 학생들이 없었고, 더 큰 피해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강릉 지역 최초 발화지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에는 110가구 중 25가구가 불에 탔다. 불에 탄 집은 마을 곳곳에 띄엄띄엄 자리했고 집 뒤편에는 나무들이 자리했다. 대나무숲 아래에 자리했던 한 집은 까맣게 내려앉아 마치 폐가처럼 보였다. 그곳에 살던 최아무개(90) 할머니는 마을 근방 크리스탈밸리센터에 마련된 대피소로 이동했다. 마을 뒷동산에 자리한 전원주택도 빨간 벽돌만 남은 채 불에 타버렸다. 집주인의 사촌동생은 이곳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타버린 집을 지켜봤다. 집주인 윤우성(68)씨는 “늙은 사람이 돈을 벌어서 다 투자했는데 이제 어떡하느냐”며 “집만 하는 데는 1억2000만원이 들었다. 현금도 집에 있었고 금목걸이에 시계 팔찌에 패물이 많았다. 국가에서 재난선포를 했는데 도움이 되려나 싶다”고 말했다.

4일 밤 11시께 마을 주변의 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남양리 이장 김창진(74)씨는 나무로 지어진 자신의 집이 불타는 와중에 무전으로 비상방송을 해 인명피해를 막았다. 김씨는 “무전으로 전화해서 크게 비상방송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영진(55)씨는 “다친 한 사람은 술을 마시고 자다가 일어났다”며 “불똥이 여기저기서 날라와서 나무에 붙었다. 도깨비불처럼 날아다녔다”고 말했다.

마을에는 잔불들이 남아서 불씨가 번질까 봐 마을 주민들이 전전긍긍해 하고 있었다. 옥계면 남양리에 집이 불이나 이재민이 된 사람들은 100명이다. 마을 크리탈밸리센터에 70명이 갔고, 옥계초에 20명, 현내1리 마을회관 10명이 피신해 있다.

속초/이주빈 오연서 기자 강릉/이정규 기자 고성/박수혁 기자 yes@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단독] 윤석열 가짜 출근·상습 지각에…고통 시달린 경찰, 불편한 시민 1.

[단독] 윤석열 가짜 출근·상습 지각에…고통 시달린 경찰, 불편한 시민

“저는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입니다만”…탄핵 촛불 환히 밝힌 그의 말 2.

“저는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입니다만”…탄핵 촛불 환히 밝힌 그의 말

대법원 “‘이재명 무죄’ 판사 체포 시도, 사법권에 대한 중대 침해” 3.

대법원 “‘이재명 무죄’ 판사 체포 시도, 사법권에 대한 중대 침해”

‘혐의 부인’ 윤석열 담화…법조계 “재범 위험, 신속 구속해야” 4.

‘혐의 부인’ 윤석열 담화…법조계 “재범 위험, 신속 구속해야”

[단독] 도이치 주범 “주가조작은 권오수·김건희 등 합작품인 듯” 5.

[단독] 도이치 주범 “주가조작은 권오수·김건희 등 합작품인 듯”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