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자셋 여자셋> 10회 - 1996년 11월1일 방송
경인: 우리 내일 농구경기 할 때 남자애들은 응원 도구 갖고 오고, 여자애들은 음… 미니스커트 입고 와라. 초미니.
동엽: 야야. 초미니스커트 입는 것까진 좋은데, 털실은 빼자, 제발. 털실.
정안: 털실? 털실 누군데?
동엽: 누구긴 누구야. 얼굴 동글동글해서 털실 뭉쳐놓은 것 같은 제니 있잖아, 제니.
일동: 깔깔깔.
문화방송(MBC)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1996∼1999년)에서 극 중 김진수씨가 짝사랑하던 제니를 강제로 껴안는 장면. 엠비시온 갈무리.
#2.
<호텔리어> 11회 - 2001년 5월9일 방송
송혜교: 아빠, 저 호텔 경영에 대해 배우고 싶어요.
한진희: 여자가 경영은 무슨 경영! 학교 공부나 열심히 해.
25살 신동엽씨가 대학생 연기를 한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 스무살 송혜교씨가 조연으로 나왔던 드라마 <호텔리어> 속의 한 장면들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히트를 쳤던’ 드라마와 예능 등 방송 프로그램을 2019년 봄 티브이(TV)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지난달 18일 개국한 케이블 채널 <엠비시 온>(MBC ON)이 <질투>(1992년), <여명의 눈동자>(1991~1992년), <대장금>(2003~2004년), <궁>(2006년) 등 방영 당시 시청률 50%에 육박했던 인기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들을 고화질(HD)급 화질로 리마스터링해 내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채널 개국 관련 기사에는 “그 당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며 “다시보기 서비스로도 볼 수 없었던 드라마를 다시 볼 수 있게 돼서 좋다”는 댓글들이 달렸다. <아들과 딸>(1992~1993년), <경찰청 사람들>(1993년), <보고 또 보고>(1998~1999년) 등 아직 재방영 계획이 없는 드라마 방송을 요청하는 댓글들도 있다.
하지만 채널 개국 한달이 지나면서 불편함을 호소하는 반응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함께 발전한 젠더 의식 등을 반영하지 못한 장면들이 젊은 시청자들에게 의아함을 안기고 있기 때문이다. 손쉽게 외모에 대해 지적하고, 이를 웃음의 대상으로 삼는 모습도 요즘 시청자들에겐 불편함의 대상이다. 대학생 전승주(24)씨는 “최근 <엠비시 온> 채널에서 <인생극장>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봤다. 이휘재씨의 데뷔 시절 모습이 신기했는데, 이영자씨에게 ‘뚱땡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 같으면 논란이 됐을 장면인데 당시에는 웃으며 봤을 거라고 생각하니 ‘어떻게 저런 시대에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3.
<남자셋 여자셋> 6회 -1996년 10월28일
경인: 소연이 얘는 귀엽긴 귀여운데 너무 말랐어. 나는 소연이 같은 스타일 말고 혜수 같이 풍만한, 건강한 그런 스타일이 좋더라. 안 그러냐?
동엽: 야. 김혜수 말하는 거야? 김혜수가 뭘 또 풍만하냐, 뚱뚱한 거지. 뭐니뭐니해도 건강한 미의 기준은 우희진! 안 그러냐, 승헌아.
경인: 그럼 만약에 너 김혜수하고 우희진하고 둘 다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결혼하자 그런다. 그럼 누구랑 결혼할래?
동엽: 뭐 우희진하고 결혼하고 김혜수 가끔 만나면 안 되냐.
#4.
<남자셋 여자셋> 10회 - 1996년 11월1일 방송
동엽: (웃으며) 야야. 내가 방금 제니 별명 생각났는데. 방실이 어떠냐? 방실이?
경인: 방실이? 왜?
동엽: (볼을 가리키며) 여기도 방실방실하고 방댕이도 방실방실하고.
일동: 깔깔깔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방영된 시트콤 <테마게임>에서도 개그맨 김진수씨가 또 다른 개그맨 김효진씨를 향해 ‘못난이 인형’이라고 부르며 “못생긴 것들이 문제”라고 노골적으로 외모를 비하하는 장면이 나온다. 직장인 최형원(28)씨는 “저런 대사들의 배경음으로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함께 나오는 걸 보면서 어색하고 불편함을 느꼈다. 지금 만약 저런 대사가 방송에 나온다면 성희롱이나 여성 혐오라는 비난이 빗발치지 않을까”라고 지적했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드라마 등 방송 프로그램은 당시의 시대상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하기 마련”이라며 “그 당시 사회 분위기 안에서 느끼지 못했던 불평등이나 차별적 발언이 지금은 명백히 잘못됐다는 걸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옛날 방송을 보고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방송(MBC) 드라마 <해바라기>(1998년)에서 극 중 신경외과 과장인 조경환씨가 후배 의사인 추상미씨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술을 강권하는 장면. 엠비시 온 갈무리.
‘갑질’이라는 말이 대중화되지 않던 시절 상사의 폭언과 폭력이 드라마 속 단골 장면으로 나오기도 했다. 대학 종합병원 신경외과 의사들의 모습을 그린 1998년 드라마 <해바라기>에서는 신경외과 과장 역의 조경환씨가 후배 의사 역할을 맡은 차태현씨와 안정훈씨 등에게 벌로 유도 기술을 걸거나 뺨을 때리는 등 폭력을 가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선배 의사 역할을 맡은 안재욱씨가 레지던트 의사인 김희선씨의 뺨을 때리거나 선배 의사인 안정훈씨가 기침을 하는 김희선씨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싸가지 없이 치프(선배) 담배 피우는데 침 튀기는 거 봐라”라고 말하는 장면도 있다. 회식 자리에서 과장 역할의 조경환씨가 후배 의사 역할인 추상미씨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잔 놓고 기도하나? 쭉쭉 들이켜”라고 하며 술을 강권하는 장면도 나온다. 드라마 <호텔리어>에서는 호텔 회장으로 나오는 한진희씨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자신의 비서에게 주먹질을 하고 골프채로 사정없이 때리는 장면도 나온다. 오너 일가의 폭언과 폭행 문제가 뉴스에 자주 보도되는 지금 마냥 ‘허구의 이야기’로 넘기기에는 불편한 장면들이다.
문화방송(MBC) 드라마 <해바라기>(1998년)에서 극 중 안정훈이 레지던트 의사 김희선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다그치는 장면. 엠비시 온 갈무리.
이처럼 옛날 방송에 대해 시청자들은 ‘향수에 젖게 만든다’는 긍정적인 반응과 ‘일부 대사나 장면들이 불편하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동시에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향수와 불편함이 공존하는 기괴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옛날 방송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의 심리에는 낭만이 넘쳤던 그 시대에 대한 향수가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황씨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연애가 특권이 된 오늘날에는 대학생들의 연애를 주제로 한 <남자셋 여자셋>을 리메이크하거나 이같은 청춘시트콤을 만들더라도 공감을 얻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향수 이면에 존재하는 불편함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황씨는 “과거에는 문제가 되는 대사나 장면에 대한 비판을 예민한 소수의 의견으로 치부했지만 지금은 대중의 지지를 얻은 상식이 됐다”며 “옛날 방송에 담긴 그 당시의 천진난만함과 해맑음, 낭만에서 느끼는 향수 이면에는 ‘철 지난 소리’로부터 느끼는 불편함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오연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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