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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임정 100돌]문병도 갈 수 없던...김구가 아내를 가슴에 묻은 곳

등록 2019-03-27 14:14수정 2019-03-27 17:04

[임정 루트를 가다] ①

구도심 한편 ‘3층 붉은벽돌’ 건물
항저우 이전까지 6년간 사용한 곳
수립 당시 청사 위치는 확인 안돼
중국인 관리자 “사진 찍지 마세요”

“재미있는 가정을 꾸렸다”던 김구
가족 거처였던 인근 ‘영경방’엔
일 조계지 입원한 아내 간호커녕
임종도 못지킨 망명객의 비애만
18일, 중국 상하이시 황푸구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입구 모습. 3층으로 돼 있는데 청사 안은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18일, 중국 상하이시 황푸구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입구 모습. 3층으로 돼 있는데 청사 안은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지난 18일 오후, 중국 상하이 하늘은 잿빛이었다. 오전에 내린 비로 날은 추웠고 황푸(황포)강엔 찬바람이 불었다. 동방명주와 마천루의 꼭대기까지 운무가 내려앉았다. 황푸구 마당로(옛 지명 보경리)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한국에서 온 방문객 50여명으로 북적였다. 문화체육관광부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3·1 위원회), <한겨레>가 공동 기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탐방’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번 답사에는 문체부 국민소통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대한민국 정책기자단’과 3·1 위원회의 ‘100년 서포터스(자원봉사자)’, 역사 콘텐츠 등을 만드는 유명 ‘유튜버’ 등도 동행했다.

상하이 구도심에 있는 ‘마당로 임정 청사’는 1926년 3월부터 1932년 5월 항저우로 이전할 때까지 6년 동안 사용한 곳으로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붉은 벽돌로 된 청사는 3개 층이었다. 1층은 응접실과 부엌, 2층은 집무실, 3층은 침실로 1993년 한·중 두 나라의 복구공사로 복원됐다. 층마다 책상과 의자, 책장, 침대 등 옛 가구가 진열돼 있다.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옆 건물의 전시물은 2015년 보훈처의 지원을 받은 독립기념관이 제공했다. 임정의 전체적인 활동을 주로 전시해놓은 탓에 이 청사를 사용한 시점과 관련된 전시물은 찾기 힘들었다.

전시실 2층 한쪽에는 1945년 귀국을 앞두고 해방의 소회를 담은 임정 요인들의 서명표가 있었다. 한자로 쓰인 글들 가운데 ‘새살림 차리어 고로 잘살세’라는 글귀가 눈에 들었다. 답사를 이끈 박광일 작가는 “신변의 위험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이 그토록 바랐던 것은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일상의 평온함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런 소박한 바람이 그들을 이역만리로 이끌었다.

“사진 찍지 마세요. 사진 찍으면 안 돼요.” 관리인 명찰을 단 중국인 남성이 또렷한 한국말로 거듭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방문객을 따라다니며 사진 촬영을 제지하는 통에 답사객들 사이에선 “입장료까지 받으면서 왜 사진을 못 찍게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외교부 관계자는 “관리를 맡은 상하이시에 촬영 협조를 요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며 “별다른 이유 없이 촬영 금지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남의 나라에 임시정부를 차린 100년 전 그날처럼, 그 흔적마저 남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김구의 슬픈 개인사가 서린 ‘융칭팡’ 앞에서 임정 탐방 대원들이 박광일 작가(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김구의 슬픈 개인사가 서린 ‘융칭팡’ 앞에서 임정 탐방 대원들이 박광일 작가(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차라리 흔적이라도 남아 있으면 다행인 걸까. 1919년 4월11일 정부 수립 당시 청사 터는 그 흔적조차 알 수 없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김신부로’에서 열렸고 이를 통해 정부가 수립됐다는 사실만 드러났을 뿐 그 구체적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탓이다. 일부 학자들은 현순의 주거지에서 의정원 회의가 열렸을 것이라는 추정 아래 ‘김신부로 22호’를 임정 1호 청사 위치로 보고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당시 현순은 천도교주인 손병희 선생 등 국내 민족대표들이 준 운동자금 2천원(현재 가치 약 1억6천만원)을 들고 상하이로 건너온 상태였다.

임시정부는 1945년까지 26년 동안 중국에서 활약했다. 많은 이가 상하이 임시정부만 기억하지만, 활동과 근거지를 기준으로 임정은 대략 세 시기로 나뉜다. 상하이 시기(1919~1932년), 장정(長征) 시기(1932~1940년), 충칭 시기(1940~1945년)가 그것이다.

임시정부는 전체의 절반인 13년 동안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청사를 두고 활동을 벌였다. 조계지는 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으로 주로 개항장에 자리한다. 해상교통과 동양무역의 중심지로 국제 여론과 정보 수집에 이점이 있고, 영국 조계지에 견줘 독립운동가들에게 우호적인 환경과 국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던 신한청년당의 존재 등이 독립운동가들을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이끌었다. ‘동방의 파리’이자 지난 100년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국의 축소판 상하이는 그들에게 혁명의 도시였다. 현대 중국을 낳은 상하이에서 임정이 탄생했다.

임시정부는 활동 근거지에 따라 상하이시기와 장정시기, 충칭시기로 나뉜다.
임시정부는 활동 근거지에 따라 상하이시기와 장정시기, 충칭시기로 나뉜다.
발걸음을 임정 청사 인근에 있는 ‘융칭팡’(영경방)으로 옮겼다. 맞은편의 화려한 쇼핑몰 건물이 임정 청사를 굽어보고 있었다. 융칭팡은 임정 청사로부터 4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임정 청사가 있는 골목처럼 마주 보는 구조로 된 공동주택 모양이었다. 융칭팡(10호)에는 혁명가 김구의 슬픈 개인사가 서려 있다.

원래 이곳은 동농 김가진과 아들 김의한 부부의 거처였다. 대한제국 당시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등 고위관료를 지낸 김가진은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 비밀결사인 조선독립대동단 결성을 주도한 그는 검거 위기에 처하자 74살의 고령으로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고문으로 참여했다.

아들 김의한 선생은 1922년 7월 아버지 김가진이 별세하고 부인 정정화 여사가 서울에 머물게 되자, 김구의 가족에게 이 집을 내줬다.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아내 최준례, 그리고 두 아들(김인, 김신)과 함께 여기에 살았다. 이때를 일러 김구는 <백범일지>에 “재미있는 가정을 꾸렸다”고 단출하게 적었다. 망명자의 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단란했던 행복은 잠시였다. 1923년 막내 신을 해산하고 몸조리하던 최준례 여사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크게 다쳤다. 폐렴까지 겹쳐 결국 훙커우의 폐의원에 입원했다. 일본 조계지인 훙커우 병원에 김구는 문병을 갈 수 없었다. 페니실린을 쓰면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임정 예산을 사적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고 믿은 그는 이조차 모른 체했다. 이듬해 1월1일, 최 여사는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6살이었다. 경성 경신학교 출신의 최준례는 집안의 반대에도 김구와 결혼을 한 신여성이었다. 임종조차 지킬 수 없던 백범은 아내의 묘비명에 생몰 시기만 새겼다.

1925년 임정 경무국 경호관이었던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전당포에 맡겨 마련한 돈으로 김구의 생일상을 차린 곳도 융칭팡이었다. 아내를 잃고 괴로워하는 김구에게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듬해 12월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뒤 검거돼 순국했다. 처음으로 생일상을 받은 김구는 나석주를 기려 죽는 날까지 더는 생일을 지내지 않았다.

상하이 시절의 백범 가족. 장남 인과 부인 최준례 여사. <한겨레> 자료사진
상하이 시절의 백범 가족. 장남 인과 부인 최준례 여사. <한겨레> 자료사진
김구의 비서이자 임정의 실무요원이었던 김의한과 정정화 부부는 광복되기까지 백범과 함께했다. 홀로 있는 임정 요인들의 식사 뒷바라지부터 독립운동자금 모금, 한국독립당 참여, 대한애국부인회 조직까지 떠맡은 건, ‘임정의 잔다르크’로 불린 부인 정정화였다. 김구의 아내 최준례의 임종을 지킨 것도 그였다. 두 부부는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었다.

1926년까지 김구가 머물던 융칭팡 일대는 현재 유명 상점과 식당으로 변했다. 골목을 벗어나자 이탈리안 레스토랑과 수제 햄버거집이 보였다. 번화가로 변한 융칭팡 길가에는 낙엽이 뒹굴었다. 일행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진 루쉰공원(옛 훙커우공원)으로 향했다.(2회에서 계속)

상하이(중국)/글·사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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