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글 깨우치미’ 대표인 함양 서산초등학교 노명환 교사(오른쪽 첫번째)가 마을회관에서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자상하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글 깨우치기’ 봉사 경남 함양 교사들
주름 깊게 패인 농투성이 할머니들의 손에는 네모칸이 촘촘하게 그려진 종이 묶음이 들려 있었다. 할머니들은 수줍어하며 선생님들에게 종이 묶음을 내밀었다. 네모칸마다 꼭꼭 눌러 쓴 ‘가갸거겨고교….’ 글자가 빼곡했다. 글 몰라 버스 못 타고
성경 못읽던 할머니들에
농촌 찾아가 가르침
한달만에 읽기·쓰기 ‘끝’ “선생님, 많이 틀렸어요?” “할머니, 이 글자는 모음이 집을 나갔네요. 모음이 바람났나 봐요?” 한 할머니가 낸 글자 연습장에는 ‘흐’자를 써야 할 칸에 ‘ㅎ’자만 덩그마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난 12월9일 오후 6시30분,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추하마을회관. 할머니들의 한글수업은 ‘숙제검사’로 시작됐다. 10명의 ‘학생’ 가운데 글자 쓰기 숙제를 안해 온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숙제검사가 끝나자 학생들은 첫 수업 때 선생님들이 사준 가방에서 한글 글자판, 연필, 지우개 등을 꺼내 수업 채비를 했다. 선생님들은 틈틈이 학생들의 연필을 손수 깎아주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2시간 내내 선생님들이 불러준 낱말을 글자판에서 찾아 동그라미를 치고, 네모칸이 그려진 글자 연습장에 쓰기 연습을 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받아쓰기 시험도 치렀다. 선생님들은 할머니 곁에 바짝 붙어 앉아 글씨 쓰는 순서가 틀리기라도 하면 곧바로 “할머니, 다시 쓰세요.”라며 지우개로 글자를 지워주곤 했다. 평생 글을 배워 본 적이 없는 이 마을 할머니들을 뒤늦게 배움의 길로 이끌고 있는 이들은 ‘우리글 깨우치미’라는 함양 지역 초등학교 교사들의 자원봉사모임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남지부 함양지회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16명의 교사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교사 가운데 한 명이 2003년 여름 한 할머니의 문맹 탈출을 돕는 과정을 담은 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돼, 같은해 겨울에 모임이 꾸려졌다. 이들은 그 뒤부터 지금까지 농촌 마을과 교회를 찾아 다니며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오고 있다. 한 모둠당 교육기간은 한달인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밤 2시간 동안 수업이 진행된다. 회원들끼리 조를 짜 매일 4명의 교사들이 돌아가며 수업을 맡는다. 교사 한명이 할머니 2~3명을 맡아 개별지도를 한다. 한달 정도면 웬만큼 읽기와 쓰기를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고 한다.
글자를 몰라 버스를 못 탄다는 할머니, 교회에서 성경을 돌아가며 읽는 자리에 앉아 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는 할머니, 농협에 일보러 갈 때마다 옆 사람에게 글씨 써달라고 부탁하기가 민망했다는 할머니…. 그동안 수십명의 ‘까막눈’ 할머니들이 ‘우리글 깨우치미’의 도움으로 배움의 기쁨을 누렸다. 이날 수업을 받은 학생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양가매(75) 할머니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야무지고 자상하게 가르쳐주는지 모른다”며 “낮에는 아이들 가르치느라 힘들었을텐데 이렇게 먼 길을 달려와 밤 늦게까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사들은 할머니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익혀가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절로 힘이 난다고 입을 모았다. 모임 대표인 노명환 교사(함양 서상초)는 “평생 못 배운 한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오신 분들이라 그런지 배움에 대한 욕구가 대단하다”며 “낮에 밭일하면서 호미로 전날 배운 글자를 땅에 써보는 할머니도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저희들이 방학 중에도 열심히 가르쳐드릴 테니까 오는 설날에는 꼭 할머니들 손으로 편지 써서 손자들 세뱃돈 봉투에 넣어 주세요. 하실 수 있죠?” 조현우 교사(함양 지곡초)의 말에 할머니들은 활짝 웃으며 박수로 화답했다. 함양/글·사진 이종규 기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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