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내걸린 법원 상징물.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법원이 성범죄 사건 재판 기록을 복사해줄 때 피해자의 정보를 익명처리 해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권고가 나왔다.
인권위는 18일 법원행정처장에게 성폭력 범죄와 관련된 재판 기록을 열람·복사할 때 피해자의 이름을 익명 처리 해야 한다며 관련 규정 정비를 권고했다. 현재 ‘재판기록 열람·복사 예규'는 성범죄 사건 재판기록에 대한 익명처리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인권위의 결정문을 보면, 성범죄 피해자의 남편인 진정인 ㄱ씨는 2017년 8월 고등법원으로부터 받은 공탁금 통지서에 피해자인 아내의 주소·주민등록번호·연락처 등 인적사항이 모두 기재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ㄱ씨는 법원의 재판기록 열람·복사 담당자인 ㄴ씨에게 이유를 물어 가해자 쪽 변호사가 같은해 6월과 8월 두 차례 재판 기록을 복사 신청했다는 말을 듣게 됐다. ㄱ씨가 아내의 신상정보가 유출됐다며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한 까닭이다. 가해자 쪽 변호사 사무실 직원은 재판 기록 복사본에 기재돼 있던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보고 공탁 신청을 했다고 한다.
ㄴ씨는 재판 기록을 복사하며 피해자 정보를 익명처리 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조사 과정에서 ㄴ씨는 “형사 사건의 재판기록 열람·복사와 관련해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 발생을 막기 위해 노력해왔다”며 “특히 피해자 등의 인적사항과 관련된 복사 신청의 경우에는 (재판기록 열림·복사) 신청서에 누구의 인적사항인지를 특정하여 기재하도록 하고, 기록에 있는 해당 당사자의 연락처로 전화해 (열람·복사) 동의 여부 등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ㄴ씨는 “이 사건에서 실제로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업무 과실로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를 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법원이 성폭력 범죄 가해자 쪽이 신청한 사건기록을 복사할 때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익명 처리하지 않은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행위라고 밝혔다. 이에 해당 지방법원장에게 담당자 주의 조처 및 직원 직무교육을 권고했다. 아울러 인권위는 재판기록 복사와 관련된 규정 정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결정문에서 검찰의 경우 피고인 또는 변호인이 검사에게 공소 제기된 사건에 관한 서류 열람 등을 신청하면, 피해자의 명예나 사생활의 비밀 또는 생명·신체의 안전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열람 범위를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반면, 법원의 ‘재판기록 열람·복사 규칙 및 예규’에는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신상정보 익명화 조처에 관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법원행정처장에게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익명 조처하도록 명시하는 등 재판기록 열람·복사 관련 규정을 정비하라고 권고했다.
오연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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