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과정에서 불법 구금과 고문을 당한 뒤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대법원은 재심 판결 확정 전에는 피해자가 국가배상청구를 할 수 없었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돼 국가배상책임이 없다는 피고 쪽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정아무개씨 등 가족 9명이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5억5천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고 7일 밝혔다. 대법원은 “무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원고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씨는 1981년 9월15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성남경찰서에 연행됐다. 버스안내양 등을 상대로 ‘이북은 하나라도 공평히 나눠 먹기 때문에 빵 걱정은 없다’ 등의 말을 했다는 이유였다.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상태로 6일가량을 경찰서에서 폭행과 고문을 당하며 수사를 받았다. 대법원은 1984년 10월 정씨에 대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의 유죄를 확정했다. 정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대부분 상실했고 청력에도 이상이 생겼다. 그러나 2014년 8월21일 재심을 통해 정씨는 무죄가 확정됐다. 정씨와 가족들은 2015년 3월9일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위법행위에 대해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2심에서는 원고 패소 결정이 나왔다. 1심 재판부는 “수사관들의 불법체포, 구금행위가 일부 인정되어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채권이 인정된다고 해도 금전의 급부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에 대한 권리는 불법행위일로부터 5년 동안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로 소멸한다고 할 것”이라며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81년 9월로부터 5년이 지난 2015년 9월에야 소를 제기했으니 손해배상채권은 소멸했다는 것이었다. 2심 재판부도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이 권리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정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다른 판단을 했다. 재판부는 “원심은 재심 대상 사건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 원고들이 권리 행사를 할 수 없는 장애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봐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는 소멸시효 항변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짚었다.
사건은 고등법원으로 되돌아간다. 대법원 관계자는 “소멸시효 5년은 완성됐지만 무죄 판결 확정 전까지는 소송을 제기하는 등 원고가 권리 행사하는 데에 장애가 있었으니 기간을 다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기간 안에 소송을 제기했으면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승소 판단이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과거사 손해배상청구는 재심판결 후 6개월 이내부터 단기소멸시효 기간인 3년 안에 제기해야 한다는 판례가 있다. 대법원은 박근혜 정부 첫 해인 2013년 12월 간첩 조작 사건 등 인권침해·조작 의혹 사건의 소멸 시효를 ‘재심 무뇌 확정 이후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줄여 판결한 바 있다.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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