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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풀무질 떠나는 은종복 대표 “‘공포의 A4’로 뜻 나누고 싶었다”

등록 2019-02-02 15:20수정 2019-02-03 15:55

[토요판] 인터뷰
1993년부터 26년간 풀무질 운영
직접 쓴 글 인쇄해 나눠주고
동네 사랑방 역할 하며 보낸 세월
“제주도 내려가서 또 책방 할 것”

대학가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
30년만에 40여개서 단 2곳으로
“대학 앞 책방은 대학생들이
틀에 박힌 사고 넘어서는 데 도움”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앞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을 26년째 운영해온 은종복 대표가 서점 안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앞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을 26년째 운영해온 은종복 대표가 서점 안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지난달 서울 성균관대 앞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이 폐업 위기에 놓였단 사실이 알려지자, 풀무질은 ‘때 아닌 호황’을 누리게 됐다. 풀무질에 담긴 추억을 잃기 싫어서,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산 게 미안해서 등 각종 사연을 들고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풀무질을 26년간 지켜왔지만 결국 오는 6월 떠나게 된 은종복 대표를 만났다.

“책방이 폭망(폭삭 망했다는 의미)하고 나니까 위로해주러 오는 사람이 많네요.”

지난 29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인문과학캠퍼스 정문 근처 책방 ‘풀무질’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방 아저씨’는 씁쓸하게 웃었다. 책방 안에는 컵라면을 먹는 단골 손님이 있었고, 책을 구경하며 한참 동안 수다를 떠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책을 사러 왔다기보다는 놀러온 듯 보였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책방에는 여러 명의 손님들이 다녀갔고, 전화벨도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때마다 책방 아저씨는 “6·10항쟁 다음날인 6월11일까지만 하고 그만두는 거 아시죠? 젊은 친구들이 인수해서 더 잘 할 거니까 자주 찾아주세요”라며 작별인사를 했다. 손님들은 “더 자주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아쉬움을 표현했고 아저씨는 “책방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요”라고 답했다. 그러곤 “잠깐만 기다려봐요. 내가 쓴 글인데 이것도 좀 읽어봐요. 인쇄해서 줄게요”라며 이면지에 출력한 자신의 글을 나눠줬다. 일명 책방 손님들 사이에서 ‘공포의 A4’로 알려진 종이다. 아저씨는 종종 자신의 생각이나 책을 읽고 느낀 점 등을 쓴 뒤 이면지에 인쇄해서 손님들에게 나줘줬다. 책을 사든 안 사든, 처음 본 손님이든 단골이든 상관없었다. 풀무질에 들어선 사람은 무조건 ‘공포의 A4’를 받아가야 했다. 명륜동에서 살거나 근처 대학을 다니면서 풀무질에서 한번이라도 책을 사봤다면 이 독특한 책방 아저씨, 은종복 대표(54)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끔 망해야 하나, 하하”

풀무질은 1986년 2월, 학생운동의 열기 속에서 성균관대 앞에 둥지를 튼 서점이다. ‘풀무질’은 대장간에서 낫이나 칼을 만들 때 센 바람을 불어넣는 행위를 일컫는다.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학회지의 명칭을 빌린 것으로 “전두환 정권에 불바람을 일으켜 맞선다”는 저항의 뜻을 담고 있다. 은 대표는 1993년 4월1일부터 풀무질의 세 번째 대표로 일하며 26년 가량 서점을 운영해왔다. 경영난으로 폐업 위기에 처했지만, 책방이 어렵다는 소식이 <한겨레> 보도로 알려진 뒤, 책방을 계승하겠다는 인수자가 나서 오는 6월 넘겨주기로 했다. 풀무질을 계승할 이들은 록밴드 ‘전범선과 양반들’의 보컬인 전범선씨 등 ‘20대 청년 3인방’이다.

―폐업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지난달 <한겨레> 기사(1월7일 ‘34년 사회과학서점 풀무질도 폐업위기’)가 나가자마자 전화가 수십통 왔다. 영국에서 온 전화도 있었다. 성대에서 공부한 뒤 변호사가 됐고 영국에서 연수 중이라고 했다. ‘법학 책을 많이 샀지만 형님이 권해준 책들을 읽고, 형님이 나눠준 글을 읽고 삶이 바뀌었다’며 ‘책방 문을 닫지 말아달라. 5월에 한국 돌아가면 인수하겠다’는 말까지 하더라. 카카오페이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50만원을 보낸 사람도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겨울방학에는 하루에 30만원어치 팔기도 힘든데 요즘은 100만원어치 넘게 판다. 지방에서 일부러 책을 사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인터넷서점에서만 책을 샀는데 미안하다면서. 또 오래된 책방이니 못 구했던 책들이 있을까 싶다며 찾아와 절판된 책들을 골라간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때 아닌 ‘호황’이다. 가끔 망해야하나 싶다.(웃음)”

―20대부터 50대까지 책방에서 보냈다. 책방을 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입사 원서 한번을 안 냈다. 소설 쓴다고 집에 있다가 1년 반 동안 신문 배달을 했다. 그러다 풀무질 자리가 나온 걸 보고 인수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다른 책방이 아니라 세상을 맑고 밝게 만드는 ‘풀무질’이라서 하기로 했다.”

―스스로 대표, 사장이 아닌 ‘일꾼’이라고 표현한다.

“이 땅이 행복한 세상이 되려면 농사꾼, 도시빈민, 노동자 등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장이나 대표가 아니라 일꾼이라고 불려지는 게 좋다. 책방의 주인은 책을 사는 사람들이고, 나는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쓴 글을 손님들에게 나눠주는 게 인상적이다. 왜 글을 나눴나.

“2003년부터 일명 ‘공포의 A4’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책방에서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다보니 주말에 집회에 나가거나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과 함께 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글로 함께 하겠다 생각했다. 또 책방의 일꾼으로서 뜻을 나누고 싶었다. 어떤 책을 사라고 강매할 순 없지만 1분이면 읽을 수 있는 글들을 통해 일꾼의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세월호 이후에는 쓰러지는 가슴으로 글을 쓰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기억에 남는 일도 많겠다.

“1997년 4월15일 <전태일 평전>이나 <월간 말> 등을 판다는 이유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들의 압수목록 상당 부분들이 다 시내 대형서점에 팔던 책이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왜 그들은 안 잡아오냐고. 그랬더니 수사관이 ‘그들은 책 팔아서 돈 벌려고 하는 거고 너는 북괴를 이롭게 하기 위해 하는 거다’라고 하더라. 2주는 남영동 대공분실, 2주는 서울 구치소에 있다가 한달만에 나왔다.”

그럼에도 또 책방!

1990년대초만 해도 서울 대학가에는 40여개에 달하는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3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백두’와 ‘전야’(서울대), ‘장백서원’과 ‘황토’(고려대), ‘녹두’(동국대), ‘서강인’(서강대), ‘이어도’(홍익대), ‘오늘의 책’(연세대) 등이 경영난을 이유로 속속 문을 닫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그나마 남아있던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폐업하면서 풀무질과 ‘그날이 오면’(서울대), ‘인서점’(건국대), ‘장백서원’(고려대), ‘청맥’(중앙대) 등만 남게 됐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은 풀무질과 그날이 오면 두 곳 뿐이다.

―2011년 문을 닫은 중앙대의 청맥은 지난해 ‘청맥살롱’이라는 카페로 재탄생했다. 청맥살롱은 청맥처럼 인문사회과학서점은 아니지만, 다양한 도서를 판매하는 북카페다. ‘장백서원’은 2001년 문을 닫았지만, 2016년 ‘지식을 담다’라는 인문사회과학서점이자 북카페로 다시 태어났다. 다른 형태로 바꿀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모두 나름 의미가 있는 시도들이다. 하지만 5만권의 장서를 갖추고 서로 쓴 글도 주고 받고 책 추천도 해줄 수 있는 곳은 책방 형태가 제일 낫다.”

―풀무질을 다른 이들에게 넘기고 제주도에 가서 서점을 연다고 들었다. 왜 또 책방인가.

“아들이 아빠는 다른 일 못할 거라고 하더라. 아내도 아들도 책을 좋아해서 동의했다. 제주도는 서울보다는 서점 운영 비용이 덜 들 것으로 보인다. 이름도 ‘제주 풀무질’로 할 거다. 풀무질의 정신을 이어가고 싶어서다. 제주도에선 세가지 부류의 책을 각각 100종씩 갖추고 싶다. 첫째는 내가 26년 동안 책방을 하면서 곱씹어 읽었던 책들이고, 두번째는 내가 아직 안 읽었거나 읽다 말았지만 이 세상을 맑고 밝게 바꾸고 세상을 새롭게 세우는 책들이다. 마지막으로 100종은 언론에서 소개하거나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최신 인문사회과학 책들이다.”

대학 앞, 동네책방의 역할

은 대표는 대학가에서 사라지고 있는 인문사회과학 책방들이 다시 부활하길 바란다고 했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아보인다.

―요즘 대부분 사람들은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산다. 또 전자책도 많이 읽는다. 이렇게 시대가 변했는데, ‘동네책방’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와닿지 않는다는 말들도 있다. 동네책방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나.

“책방은 책을 매개로 하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서점은 전자상거래일 뿐이다. 대형서점도 마찬가지고. 인터넷 서점이나 대형서점에서는 지난번 산 책에 대해 책방 일꾼과 감상을 나누거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슨 책을 선물할지 물어볼 수 없지 않나. 책방에서는 김수영 시집을 사러 온 사람에게 신동엽 시를 추천할 수도 있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사는 사람에게 <우리들의 하느님>도 추천할 수 있다. 책방 일꾼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있다. 책을 사러 온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 어제도 우리 책방에 찾아온 서로 모르는 손님 5명이 탁자에 둘러앉아 토론하면서 술을 마시다 갔다.”

―대학 앞에 특히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이유는 뭔가.

“언제부터인가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됐다. 지금 대학은 1학년 때부터 취업공부에 매달린다. 대학에선 교양 공부를 충분히 해서 고등학교 때까지의 틀에 박힌 공부에서 벗어나 상상을 펼칠 수 있는 힘을 키워야한다. 물론 대학 앞에 책방들이 다시 생긴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를 제대로 이끄는데 힘을 보태지 않을까 싶다.”

―동네 책방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16년에 프랑스에 다녀왔다. 도시 골목골목마다 책방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프랑스는 완전도서정가제를 20년 전부터 해오고 있다. 더 놀라운 일은 책방을 새로 열려고 하면 정부에서 (우리나라 돈 기준) 10억원 정도를 ‘10년 거치, 10년 상환, 무이자’ 조건으로 빌려준다. 책방을 해서 돈을 많이 벌기는 힘들지만 망하는 일도 없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출판사가 인터넷서점에 책을 더 싸게 주지만 프랑스는 반대로 동네책방에는 40% 이익을 주고 인터넷 서점에는 20%의 이익을 준다. 또 독일에서는 동네책방에 있는 책은 인터넷 주문이 안된다. 책값은 정가로 하고 택배비도 주문한 사람이 부담한다.”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은?

“권정생이 쓴 <우리들의 하느님>, 님 웨일즈의 <아리랑>, 이영희의 <대화>, 존 로크의 <통치론> 같은 책이다. 내가 곱씹어 읽은 책들이다. 또 마르크스의 <자본론>,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같은 책들도 추천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

“우리 모두 생각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옳다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많이 걷고 강과 바다와 들로 다니면서 자신과의 대화를 많이 하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그러다보면 책도 많이 읽게 될 것이다. 책만 읽으면 바보가 되지만 자연과 함께 하면 자연의 엄숙함, 인간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인터뷰를 끝내고 그가 풀무질 운영 이야기를 쓴 에세이집 <책방 풀무질-동네서점 아저씨 은종복의 25년 분투기>을 샀다. 책 앞장에 저자의 한 마디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날을 함께 맞아요.”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앞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의 은종복 대표.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앞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의 은종복 대표.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앞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앞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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