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심 재판부 유죄 선고 이유
‘성인지 감수성’ 판례 길게 인용
“성폭행 피해자 대처 양상은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피해자 진술 신빙성 인정
“피해자다움은 편협한 관점”
“수행비서로 업무 성실히 한 게
피해자 모습 아니라고 할 수 없어…
성폭행 다음날 식당·와인바 동행
피해자로서 할 수 없는 모습 아냐”
수행비서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은 뒤 법정구속돼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현장풀 한겨레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성폭행, 성희롱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해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고 문제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여론이나 불이익한 처우, 신분 노출의 피해 등을 입기도 해온 점 등에 비춰보면,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1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행 사건 항소심 재판은 지난해 10월에 나온 대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판례를 길게 인용하며 시작됐다. 안 전 지사와 성관계 뒤 보인 행동 등에 비춰볼 때 ‘성폭행’이라는 피해자의 진술을 믿지 못하겠다는 1심 판단을 모두 뒤집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박정화 대법관이 주심을 맡았던 강간사건 재판에서 대법원은 “개별적, 구체적인 사건에서 성폭행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피해자다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성폭행 뒤에는 이런 행동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선입견은 법정에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4월 대법원(주심 권순일 대법관)은 성희롱 사건에서 같은 취지의 판례를 먼저 내놓았다.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두려움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뒤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 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다가 다른 피해자 등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계기로 비로소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 사실을 신고한 뒤에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관련 진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지난해 8월 안 전 지사의 1심 선고 때는 이 판례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당시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는 안 전 지사가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이자 피해자 김지은씨의 상사로서 ‘업무상 위력’을 갖는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 위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안 전 지사의 항소심 재판장인 홍동기 서울고법 형사12부 부장판사는 대법원 판례를 바탕으로 안 전 지사의 성폭행·성추행 혐의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범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피해자다움’에 대한 가해자쪽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안 전 지사 쪽은 “김지은씨가 도저히 피해자라고 볼 수 없는 행동을 했다”며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는 다음날 아침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 식당을 알아보거나, 안 전 지사 등과 함께 와인바에 간 점, 안 전 지사가 이용하던 미용실에서 자신의 머리를 손질한 것 등이 전혀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김씨가 동료들에게 장난스러운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안 전 지사에게도 친근감을 나타내는 이모티콘을 전송한 사실도 그 근거로 들었다. 1심은 이를 받아들여 안 전 지사의 혐의 전체에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수행비서로서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피해자의 모습이 실제 간음당한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피해자의 성격이나 구체적 상황에 따라 대처는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변호인의 주장은 정형화한 피해자라는 편협한 관점에 기반한 것”이라고 질타했다. 홍 부장판사는 “당시 지위에 비춰 피해자가 7개월이 지나서야 피해 사실을 폭로하게 된 사정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며 “피해 사실을 곧바로 폭로하지 않고 그대로 비서직을 수행하기로 한 이상, 그런 행동이 피해자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했다.
법조계와 여성계에선 피해자의 진술만이 거의 유일한 ‘증거’가 되는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을 깼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앞으로 유사 사건에서 합리적 판결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법관별로 편차가 커서 이를 줄이는 법관 성인지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남일 고한솔 박다해 기자 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