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는 허자연씨(오른쪽). 허씨는 제주의료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2010년 3월 출산했다. 제주/김진수 기자 jsk@hani.co.kr
2009년부터 2010년 사이 제주의료원 간호사 9명이 유산하고, 4명이 연달아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낳았다. 뒤이은 조사에서 간호사들이 업무상 태아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생식 독성 물질을 다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한 간호사 4명은 2012년 12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다가 반려됐다. 이에 간호사 4명은 2014년 2월 서울행정법원에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요양급여신청 반려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임신 중에 업무로 인해 건강이 손상되고 이것이 출산 후에 선천성 심장질환으로 진단된 경우에 이를 산업재해보상법상 업무상 재해로 보고 ‘요양급여’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업무상 재해는 업무상 사유로 입은 부상 또는 질병인데, 출산 이후에는 어머니가 아닌 출산아가 지닌 선천성 질병으로 바뀌므로 그 업무상 재해는 원고(간호사)들의 자녀에 대한 질병”이라는 논리였다. 현재 이 소송은 대법원 판단만 남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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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판단은 2심 재판부와 달랐다. 인권위는 2009~2010년 제주의료원에서 일하던 간호사가 낳은 아이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갖고 태어났다면 이를 업무상 질병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이러한 내용의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고 29일 밝혔다.
인권위는 “이 사건 소송이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한 여성 근로자와 아동의 전 생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며, 소송 결과에 따라 향후 유사소송에서 중요한 기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8조 제1항의 ‘인권의 보호와 향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재판’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대법원에 의견을 제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인권위는 이런 판단의 근거로 서울대학교의 역학조사 결과와 1심 판결을 제시했다. 인권위는 “2012년 제주의료원이 서울대에 역학조사를 의뢰한 결과, 원고인 간호사들의 선천성 심장질환의 발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고, 1심 역시 임신부와 태아가 유해한 약물에 노출돼 심장질환이 있는 아이를 출산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아울러 “태아는 모체와 동일체이므로 태아의 건강 이상은 곧 근로자인 모체의 건강 이상”이라고 덧붙였다.
인권위는 또 2심 재판부의 판결이 헌법과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헌법 제36조 제2항은 국가의 모성 보호 의무를 규정하고, 헌법 제32조 제4항에 따르면 여성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및 근로 조건에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는다”며 “헌법 제10조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데, 태아의 생명권 역시 이 조항에 의해 보호된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이어 “국제노동기구(ILO) ‘산업안전보건협약’에 따라 국가와 사용자는 공공부문을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작업환경에 내재된 위험요소를 최소화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할 의무가 있고, ‘화학물질협약’ 제15조에 따라 사용자는 작업장 내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갖는 유해성에 대해 소속 근로자에게 알리고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업무상 원인으로 발생한 태아의 건강 손상을 신생아의 질병으로 한정해 해석하는 2심 법원의 판단은 산재보상제도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봤다. 인권위는 “제주의료원은 임신 당시 야간근무 제외를 빼면 모성 보호를 위한 특별한 조치가 부족했고, 원고인 간호사들에게 태아 및 임신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약품을 취급하게 하면서 이에 대한 고지나 예방 조치가 부족했던 점 등을 고려하면 법원의 판결은 근로자와 그 가족 보호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산재보상제도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유산만 업무상 재해로 판단하는 것에 차별 소지가 있다고도 판단했다. 인권위는 “공단이 유산 및 유산증후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고 있으나 선천성 장애, 질환아 출산에 대해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 평등원칙 위반”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인권위의 설명을 보면, 2심 재판부는 유산 및 유산증후의 경우 여성 근로자의 근로 능력의 감소를 초래할 수는 있지만, 선천성 질병을 가진 자녀의 출산은 여성 근로자 본인의 신체 기능이나 노동 능력의 감소에 별다른 영향이 없으므로 이를 다르게 취급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인권위는 이에 대해 “임신부는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많은 건강상 어려움을 겪게 되고, 태아의 건강 손상이 있거나 알게 될 경우에는 진료 횟수 증가, 경제적·정신적 고통 등으로 인한 어려움이 가중돼 본인의 신체 기능이나 노동 능력 감소에 영향을 미친다”며 “유산한 경우와 달리 태아의 건강 손상을 산재보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형식적으로 법을 해석해 여성 근로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서 차별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오연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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