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만에 처음으로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추모제’에서 시민들이 “종철아 보고 싶다” 펼침막을 들고 개막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있다. 사진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박종철을 살려내라! 박종철을 살려내라!” 13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옛 남영동 대공분실) 앞 골목을 가득 채운 300여명의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대부분 백발이 희끗희끗한 이들의 손에는 “종철아 보고 싶다” 펼침막이 들려 있다. 행렬은 철문 앞에서 멈춰 섰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1987년 6월 거리를 채웠던 구호가 2019년 1월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 울려 퍼졌다. 담벼락 위에 올라 선 한 남성이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민주와 인권의 시대를 만나러 갑시다. 다 같이 함성으로 철문을 열겠습니다. 함성 시작!” 시민들이 소리를 지르며 철문을 밀어 제쳤다. 박정희독재시절 공포정치의 유물에서 지난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처음 열린 ‘박종철 열사 32주기 추모제’의 시작을 알리는 퍼포먼스였다.
13일 열린 ‘박종철 열사 32주기 추모제’에서 박 열사와 부친 박정기씨의 영정을 1987년 고문치사 현장인 509호실에서 밖으로 모시고 나오는 의식이 진행됐다. 김봉규 선임기자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10월 세워진 뒤, 박 열사를 비롯해 수많은 민주 인사를 고문한 장소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다 과거 청산의 의미로 2005년 ‘경찰청인권보호센터’로 전환됐다. 하지만 운영은 여전히 경찰이 맡고 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과거 독재와 고문의 역사를 반성하는 공간으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시민들이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결국 지난달 26일에야 경찰이 모두 철수하고 시민 공간이 됐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위탁을 맡아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하기로 한 것이다.
시민들이 마당에 들어서자 영상과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유난히도 더웠던 2018년 여름, 바로 옆 남영역을 지나는 기찻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날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아버지는 나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나도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와 나는 31년 만에 남영동 509호실에서 만났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본다.” 스크린에선 박 열사와 아버지 박정기씨의 영정 사진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등장했다. 아들을 대신해 30년 넘게 민주화 투사로 헌신했던 아버지는 지난해 7월 한많은 삶을 마쳤다.
부자의 영정을 509호실에서 들고 나오는 의식으로 시작된 이날 추모제에는 최광기씨의 사회로 700여명의 시민들이 함께 했다. 김세균 ‘민주열사 박종철기념사업회’ 회장은 “마침내 박종철 열사가 32년 만에 경찰의 굴레에서 벗어나 509호실에서 나올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촛불혁명을 승리로 이끈 국민 모든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전민노련 사건’ 때 이곳에서 고문을 당했던 유동우씨는 추도사에서 “지난해 이곳을 돌려받았지만 불행하게도 원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며 “경찰청인권센터 시절은 사실상 증거인멸 과정이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제대로 복구해 다시는 비인간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3일 ‘박종철 32주기 추모제’에서 영화 <1987> 제작팀(왼쪽부터 배우 김윤석·감독 장준환·작가 김경찬)이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회장 김세균)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뒤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
영화 <1987>에서 사건을 은폐하는 ‘악덕 경찰’로 열연한 배우 김윤석씨는 “영화를 보고 박종철 열사의 누님이 ‘내가 아는 내 동생 종철이는 절대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알려왔다”면서 “그 마음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 열사의 형 종부씨는 “유족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지난 세월 애써왔고 소망했던 것들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라며 큰절로 답례했다.
13일 박종철 열사 32주기 추모제에서 민주인권 깃발이 게양된 가운데 열사의 형 박종부씨가 유가족을 대표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추모식은 한겨레 평화의 나무 합창단을 비롯, 박종철 합창단·아크로합창단(서울대 85학번 동문)의 선창으로 박 열사 헌정곡 ‘그날이 오면’을 다함께 부르며 막을 내렸다.
13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 조성예정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처음 열린 ‘박종철 열사 32주기 추모식’에서 평화의 나무 합창단이 ‘인간의 노래’를 공연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13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2주기 추모제에서 평화의 나무 합창단·박종철 합창단·아크로 합창단이 무대와 건물 옥상에서 박 열사 헌정곡인 ‘그날의 오면’을 부르고 있다. 사진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어진 헌화에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79)씨는 “그동안 여기 올 때마다 마음을 졸였는데, 이제 국민의 품으로 남영동이 돌아왔으니까 마음이 덜 떨린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박 열사의 영정사진이 놓인 509호실에는 시민들이 헌화한 국화향으로 가득했다.
이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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