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블랙리스트 판사 1호 서기호 변호사
“사법농단 판사 솜방망이 징계 한심
행정처에 현직 판사 상근제 없애야”
‘가카 빅엿’ 페이스북 발언 2년 전
촛불 재판 개입한 신영철 사건 때
법원장이 불러 “요주의 인물” 경고
블랙리스트 판사 1호 서기호 변호사
“사법농단 판사 솜방망이 징계 한심
행정처에 현직 판사 상근제 없애야”
‘가카 빅엿’ 페이스북 발언 2년 전
촛불 재판 개입한 신영철 사건 때
법원장이 불러 “요주의 인물” 경고
“존경받는 판사가 되는 게 꿈이었죠. 본격적으로 잘해보려고 하던 참에 나가라고 하니 참 황당했죠.” 양승태 대법원에게 찍혀 2012년에 재임용에서 탈락했던 서기호 변호사가 지난 26일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상록’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서기호 변호사는 양승태 대법원에게 찍혀 2012년 강제로 판사 옷을 벗었다. 당시에도 ‘비판적 판사에게 재갈 물리기’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최근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에서 법원행정처가 서기호 당시 판사의 재임용 탈락을 사실상 기획했음을 보여주는 문건들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 26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나 사법농단 실태와 법원 민주화 등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재임용 탈락으로 법원을 떠나는 서기호 판사가 2012년 2월 17일 낮 서울 도봉구 서울북부지법 앞에서 법원노조와 시민들이 열어준 퇴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012년 2월 17일 재임용 탈락으로 법원을 떠나는 서기호 판사가 서울 도봉구 서울북부지법 앞에서 법원노조와 시민들이 열어준 퇴임식에서 그를 지지하는 트위터 모임 ‘국민의 눈’ 힘 회원들이 선물한 '국민법복'을 입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페이스북 등 통해 ‘표현 자유’ 길 터
비폭력대화법 재판 적용 등 실험 “탄핵돼야 할 사람을 차관급 대우해” 판사 재임용 탈락은 1997년 이후 15년 만에 처음이었다. 서기호가 법원을 떠나던 2012년 2월17일 서울 북부지방법원 정문 앞에서는 북부지법 직원들과 시민들이 연 ‘국민 퇴임식’이 열렸다. 그의 구명을 바라는 트위터 모임 ‘국민의 눈’ 회원들은 이날 서기호에게 자신들이 만든 ‘국민법복’과 ‘국민법관’ 임명장을 전달했다. -재임용 탈락은 개인적으로는 고난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판사 등 법조인의 표현의 자유를 위한 싸움이라는 측면이다. “검찰도 마찬가지지만 법원 수뇌부는 개별 법관의 표현의 자유에 매우 인색하다. 법원이 통일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게 법원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저는 판사도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사회적 이슈나 쟁점에 대한 자기 견해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활동도 그런 차원이었다. 2011년 12월 쯤엔가는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보고난 뒤 CBS의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이건 팩트에 가깝고, 저도 많이 반성이 됐다, 앞으로 저렇게 해서는 안 되고, 공개재판이니 녹음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현직 판사가 그런 인터뷰를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법원 내부가 시끄러웠겠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보관이 아닌 판사가 스스로 외부 인터뷰를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여기던 때다. 며칠 뒤 법원장이 불러서 갔더니 법원의 공식 입장과 다른 것을 인터뷰하면 어떻게 하냐고 하더라. 당시 차한성 행정처장이 ‘부러진 화살은 허구다, 실제 재판을 그렇게 진행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찍힐 줄 알면서도 그랬나. “사실을 얘기하는 거니까 설마 찍히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런 나의 행동은 책을 많이 봐서 그런 것 같다.(웃음) 책을 읽다보니 폭이 넓어지고, 용기와 지혜가 좀 생겼다. 남들이 하는 대로 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면서 살고 싶었다.” -지금 판사나 검사들의 표현의 자유가 많이 나아졌다. “그렇다. 지금은 판사들이 자유롭게 실명으로 페이스북에 글을 쓰고 인터뷰도 하고 있다. 검사들도 과거에는 허가를 받아서 언론 인터뷰를 했지만, 지금은 신고만 하면 된다.” 서기호는 1997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2000년 제주 지방법원 예비판사로 법원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뒤 인천지법과 서울남부지법을 거쳐 2008년부터 서울지법 민사단독 판사로 일했다. 2009년 신영철 사건이 불거졌을 때 그는 서울지법 단독판사 대표 2명 중 한명으로, 문제 제기에 앞장섰다. -법원의 행정권력에 대한 통제 즉, 법원 민주화 문제도 서 변호사가 제기했던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최근 제안된 사법 개혁안이 대법원에서 많이 후퇴하는 등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대법원장 일인에게 집중된 사법행정 권한을 사법행정회의라는 합의제 기구에 이양해야 한다. 그리고 사법행정회의에는 외부인사가 절반 들어가서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 그리고 행정처에 현직 판사가 상근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사법발전 방안이 현직 판사들의 반대로 대법원에서 대폭 수정됐다. 이름만 행정처에서 사무처로 바꿀 뿐이지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원래 사법발전위원회 후속추진단(단장 김수정)이 마련한 안대로 가야 한다.” -사법행정 권력을 휘둘러 재판에 개입하는 등의 사법농단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징계도 솜방망이에 그쳤다. 법원이 뼈를 깎는 자성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징계에 회부된 사람 중 이민걸, 이규진, 박상언, 정다주, 김민수 등 최소 5명은 관여 정도가 심해 징계가 아니라 탄핵 대상이다. 그런데도 6개월 정직과 감봉 처분에 그쳤다. 또, 2명은 아예 불문에 부쳤다. 법원 스스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직을 받은 사람은 그 기간이 끝나면 일선 판사로 복귀가 가능하다. 그들은 고등부장이기에 관용차 지급 등 차관급 대우를 계속 받게 된다. 기가 막힌 일이다.” 1970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서기호는 3남1녀 중 셋째다. 그는 네살 때부터 2년 간 부산의 작은 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아이들이 없어 적적했던 작은 어머니가 데려다 키웠지만, 어린 그에게는 심리적인 트라우마가 됐다. 목포에서 초·중·고교를 다닌 뒤 1988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1학년 2학기에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고 싶어” 들어간 가톨릭학생회 활동에 푹 빠졌다. 2학년 때는 동아리 대표, 3학년 때는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4학년 때는 전국 조직을 만들었다. 1991년 여름 경희대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 참석하려다 경찰의 검문에 걸려 집시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받기도 했다. 이후 군 복무를 마치고 1995년 복학했을 때는 “사회운동을 계속할 자신이 없어”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서기호 변호사는 지난 26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법원 민주화를 위해서는 우선 행정처에 상근하는 판사부터 없애야 한다”고 밝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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