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건물 법원 문양 위로 빛이 쏟아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 댓글공작 사건 파기환송심 재판장이었던 김시철(53·사법연수원 19기)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이 사건 주심 판사를 ‘패싱’하면서까지 무죄 취지 판결문 초안을 작성하고, 법정에서 검사가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면 이를 깨는 내용을 덧댄 새로운 무죄 초안을 계속 ‘업데이트’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 부장판사는 2015~16년 재판 당시 ‘국정원 댓글공작’을 <손자병법>에 등장하는 ‘탄력적 용병술’이라고 옹호하는 등 편파적 재판운영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이런 식으로 1년 7개월간 재판을 진행하고도 선고를 하지 않고 다른 재판부로 떠나 ‘고의 지연’ 의혹에도 휩싸인 바 있다.
13일 <한겨레> 취재 결과,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지난달 법원행정처 전산 서버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김 부장판사의 이메일을 분석해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그가 2015∼16년 서울중앙지법 형사7부 재판장으로 원 전 원장 사건 재판을 진행하면서 당시 소속 재판연구관(판사 업무를 보조하는 로클럭)에게 무죄 취지 판결문 초안을 작성하도록 한 사실을 파악했다. 특히 2015년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검찰이 제출한 문서의 증거능력만 문제 삼아 파기환송했지만, 김 부장판사는 이보다 더 나아가 당시 국정원 심리전단팀과 원 전 원장 사이의 공모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공직선거법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를 모두 무죄라고 판단한 초안을 쓰게 했다고 한다. 김 부장판사는 재판 시작 직후인 2015년 10월 원 전 원장의 보석 신청을 받아들여 그를 석방하기도 했다.
보통 3명의 판사로 이뤄진 합의부 재판부에선 주심 판사가 초안을 작성하고, 이에 대해 재판장 등 나머지 판사가 ‘합의’를 통해 결론을 끌어낸다. 하지만 당시 주심이었던 최아무개 판사는 김 부장판사로부터 이미 작성된 초안을 전달받았고, 이에 김 부장판사에게 강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최 판사는 최근 검찰 조사에서도 “김 부장판사의 일방적인 재판 진행 때문에 갈등을 빚다가 법원행정처에 자신을 인사 조치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실제로 최 판사는 2016년 2월 인사 대상이 아닌데도 금융정보분석원(FIU)으로 파견되며 자리를 옮겼다.
검찰은 당시 김 부장판사가 법원행정처로부터 사주를 받은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 계속 조사한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대법원 자체 조사와 검찰 수사에서 당시 법원행정처가 형사7부의 ‘의중’을 파악한 문건 6건이 확인되기도 했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판결문 초안을 작성하는 것은 대단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보통 주심과 합의를 한 이후에 작성하게 된다”며 “주심과의 합의 없이 재판 시작 즈음에 판결문 초안을 작성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는 뜻”이라며 그 배경에 의문을 나타냈다.
자신의 이메일 압수수색은 위법이라는 장문의 글을 법원 내부게시판에 올렸던 김 부장판사는, 재판 관련 의혹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그는 지난 1일 내부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형사소송법 규정상 공개된 법정에서 당사자에 대해 행한 재판 진행사항 등은 모두 재판장 명의로 이뤄지고, 이 부분에 대해 사전 검토하고 준비하는 것은 당연히 재판장 업무이고 이에 관한 책임도 재판장이 부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법원 내부에선 검찰 수사를 통해 재판에 넘겨질 가능성이 있는 당사자가 법관들을 향해 부적절한 ‘개인 변론’을 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