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티엑스(KTX) 승무원을 직접고용하지 않는 코레일을 상대로 13년 가까이 투쟁해오다 복직하게 된 김승하 전 케이티엑스 열차승무지부장이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코레일인재개발원에서 오은 시인과 인터뷰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밀도라는 것이 있다. ‘빽빽이 들어선 정도’를 뜻하는 말이다. 때때로 그것은 “밀도 높은 강연”이나 “밀도 높은 대화”처럼 내용의 충실함과 연결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물리 시간에 배운 ‘어떤 물질의 단위 부피만큼의 질량’이라는 뜻도 있다. 같은 시공간에 있어도 사람이 느끼는 스스로의 밀도는 다 다를 것이다.
사는 일에 ‘견디는 것’이 개입하면 밀도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진다. 불합리와 싸우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밀어내기 위해서는 사회라는 거대한 부피, 관행이라는 관성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빽빽한 시간은 점점 길어진다. 지치지 않기 어렵다. 신념이 없으면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을 향하지 않으면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생을 돌이켜보면 시간의 밀도가 유독 높았던 한철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패기가 없었다면, 믿음이 없었다면, 함께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결코 통과할 수 없었을 시기. 김승하와
동료들의 지난 12년이 그랬다. 믿었기에 견뎠고, 옳다고 생각했기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12년이 넘는 투쟁 끝에 지난 7월 복직 결정을 받은 김승하(39) 전 케이티엑스(KTX) 열차승무지부장(이하 호칭 생략. 열차승무지부 조합원들은 복직 뒤 철도노조 각 지역 지부 소속으로 바뀜)은 27명의 ‘복직 동료’와 함께 지난달부터 경기도 의왕시 코레일인재개발원에서 집합교육을 받는 중이다. 지난 1일 다시 첫 출근(11월12일)을 준비하고 있는 그를 연수원에서 만났다.
“요즘, 묘해요”
―인터뷰 코너 이름이 ‘요즘은’입니다. 공식적으로 첫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복직이 결정되고 나서 직무교육을 받고 있어요. 2004년 케이티엑스가 개통됐을 당시에도 여기서 교육을 받았어요. 14년 전에 있었던 장소에서 또 같은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 요즘이 좀 이상하게 느껴져요. 그 당시에는 케이티엑스 승무원이 새로운 직업이었고 내가 입사해서 과연 어떤 교육을 받게 될까, 호기심과 설렘이 뒤섞인 감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묘해요.”
―‘묘하다’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립니다.
“좋다, 나쁘다 딱 잘라 표현하기 애매해요. 13년 가까이 싸우다가 순식간에 복직 결정이 되니 실감도 안 나고 이렇게 쉬운 걸 그동안 왜 못 했을까 하는 원망도 있고요. 한편으로는 다시 연수원에 들어와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반갑기도 해요.”
케이티엑스 승무원을 직접고용하지 않으려 불법파견을 택한 코레일에 항의하며 파업에 돌입했다가 2006년 5월 해고당한 승무원이 290명이었다. 그중 소송에까지 나섰던 180명은 지난 7월21일 전원 복직 결정이 됐고, 교섭 끝에 김승하를 포함해 28명이 먼저 교육을 받은 뒤 복직을 하게 됐다. 나머지 인원도 내년 상반기 안에 복직할 예정이다.
‘승무원’으로 입사했지만, 김승하는 지금 ‘역무원’ 교육을 받고 있다. 여객 규정 학습 등 전반적인 교육 내용은 14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지난달 22일부터 김승하는 복직 동료들과 ‘3주 연수’를 시작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연수원에서 생활하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있다. 강의를 듣다가 졸기도 하도, 점심시간이면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뛰어가기도 하고, 연수원 곳곳을 걸으며 가을 단풍을 보기도 한다. 그렇게 일상으로의 복귀를 준비하는 ‘묘한 시간’ 속에 그와 동료들이 있다. 연수를 마치고 오는 12일부터는 ‘현장교육’(5주)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배치된다. 현장교육 뒤 정식 근무지가 결정된다.
장기 투쟁 뒤 복직해 12일 첫 출근을 앞두고 연수를 받고 있는 김승하 전 케이티엑스 열차승무지부장(앞줄 오른쪽 첫째)과 동료들이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코레일인재개발원 연수센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인터뷰가 진행되는 연수원 건물 외벽에는 “신입사원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신입사원들을 교육하는 시설에 코레일이 고정적으로 붙여두는 펼침막을 바라보며 복직 승무원들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저 신입사원이 우리를 말하는 걸까 싶어 속으로 묻고 웃기도 해요.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 거죠.”
말을 마치며 김승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희미함이 그를 13년 가까운 시간 동안 ‘
여기’로 향하게, 기울어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희미하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희미한 희망을 붙잡고 김승하는 동료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동료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사이 강산이 한번 변하고 2년여 더 흘렀다.
―얼마 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분향소 앞에서 김득중 지부장(금속노조 쌍용차지부)과 환히 웃는 사진을 보았어요. 뭉클했습니다. 21세기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장면 같았어요.
“저희가 복직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신경 쓰인 게 쌍용차였어요. 그분들이 지금껏 연대해주신 것도 많았고 저희 또한 쌍용차 관련 집회에 참여하려고 노력했거든요. 자주 뵙게 되면 잘 알게 되고, 잘 알게 되면 절로 마음이 가잖아요. 그러다 보니 이분들의 일이 다른 투쟁 사업장보다 마음이 쓰이게 되더라고요. 복직이 결정된 뒤에 서울역에서 기자회견을 했어요. 많은 분들이 연대사를 해주셨는데, 김득중 지부장의 축하 말씀에 저희들이 다 울었어요.”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사실 무슨 말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축하한다, 우리도 좋은 기운 받아서 복직하면 좋겠다…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몸담은 현장은 달랐지만 함께 비슷한 시기를 보냈잖아요. 그렇게 바라왔던 복직인데 축하를 받고 마음껏 기뻐할 수만은 없었지요. 내 잘못이 아닌데도 그분들한테만큼은 왠지 죄송스러웠던 거죠. 편안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쌍용차 문제도 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어요. 우리 복직이 결정됐을 때보다 더 큰 안도감이 들었어요.”
‘케이티엑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빠르다’라는 형용사가 떠오른다. 열차의 속도와는 다르게, 해고된 승무원들이 한국철도공사의 정규직 업무로 돌아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주 길고 느리고 빽빽한 시간이었다.
KTX 1기 승무원으로 입사했던
김승하 전 KTX 열차승무지부장
2006년 해고 뒤 12년여 투쟁 끝
7월 복직 결정, 12일 첫 출근
설레던 신입 시절 악몽 떠올려
“홍익회 소속이니 안전업무 말라”
“1년 뒤 정규직” 모두 거짓말
2006년 파업 뒤 전원 해고돼
―11월12일 다시 첫 출근을 앞두고 있어요. ‘다시’와 ‘첫’, 언뜻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듯도 싶은데 기분이 어떤가요?
“가서 어떨까 걱정이 돼요. 저희가 승무원이 아닌 역무원으로 가는 거잖아요. 여태까지 같이 투쟁해왔는데 이제 각자 다 떨어져서 일하게 되는 거죠. 승무원으로 돌아가게 되면 한데 모여 있을 텐데, 역무원 신분이니 자신의 연고지 근처에 있는 역으로 배치될 거예요. 이제야말로 각개전투죠. 현장에서 혼자 싸워야 하니까요. 승무 경력 3년에 투쟁 경력 10여년이라, 다들 잘 버텨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그럼에도 직장을 옮기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새로운 일터에서 적응을 잘할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복직한 승무원들은 코레일이 정규직으로 고용하기로 했지만 현재 케이티엑스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코레일이 직접고용하지 않고 있다. 코레일 소속 직원이 된 복직 승무원들이 승무원 업무를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들은 케이티엑스 승무원의 코레일 직접고용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코레일 소속 역무직으로 역사에 배치돼 일하게 된다. 2006년 당시 승무원들이 코레일을 상대로 투쟁에 나섰지만 이후 들어온 승무원들이나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승무원들은 모두 현재 코레일의 자회사인 코레일관광개발 소속이다. 결국 코레일은 투쟁에 나섰던 승무원들에게만 코레일 직접고용을 허락한 모양새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정규직으로 전원 복직이니 투쟁에서 이긴 거다, 이렇게 보면 되는 걸까요?
“사실 좀 안타까워요. 제대로 되려면 ‘코레일이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을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을 바탕으로 복직이 됐어야 하는데요. 2015년 대법원이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은 코레일이 직접고용하는 것이 맞다고 했던 1·2심 재판부의 판단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었잖아요. 이제는 대법원 판결이 ‘양승태 사법농단’의 결과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판결이 자동 취소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복직 논의가 이뤄지다 보니 저희가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코레일 쪽이 마치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되어서 너무 아쉬웠어요. 우선은 다시 일하게 됐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지난 1일 경기도 의왕시 코레일인재개발원 연수센터 앞에서 김승하 전 케이티엑스 지부장이 오은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항공사보다 좋다던 철도청 승무원
―처음에 케이티엑스에 입사하게 된 동기를 듣고 싶어요.
“2004년, 케이티엑스 승무원에 지원한 사람들은 대개 항공사 스튜어디스를 준비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당시 케이티엑스도 항공기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홍보했죠. 어쨌든 같은 승무원이니 항공사 준비하던 사람들이 많이 지원을 했고 저 또한 그랬어요. 당시 공교롭게도 다른 항공사 전형과 겹쳤어요. 케이티엑스 최종 합격자 연수에 참여하면 다른 항공사 시험을 못 치르는 상황이었죠. 고민하고 있을 때, 부모님은 당연히 케이티엑스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케이티엑스 승무원은 공무원’이라고 얼마나 좋아하셨는데요. 저 또한 철도청이 하는 일인데, 나라가 하는 일인데 얼마나 체계적으로 운영할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요. 승무원은 기존에 있는 직업이지만, 고속철도 승무원은 새로운 직업이라는 생각에 마냥 설렜어요.”
―모집할 당시에는 계약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비정규직에 대한 개념 자체가 별로 없었어요. 특히 공공부문에서는 외주 위탁으로 사람을 뽑은 거의 첫 사례였거든요. 회사 들어갈 때는 당연히 정규직인 줄 알았지요. 모든 동기들이 다 그랬어요. 저희는 ‘승무원’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사람들이었어요.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어요. 케이티엑스 승무원은 ‘홍익회’라는 이름의 자회사 소속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저희가 처음 연수를 받은 곳도 바로 여기, 코레일인재개발원이에요. 당시 저희를 교육한 것도 다 철도청 분들이었고요. 홍익회에는 승무원을 교육할 인적·물적 자원이 없었거든요.”
―철도청 승무원으로 입사했는데, 홍익회 직원이 되어 있던 셈이네요.
“의문이 생겼지요. 우리는 왜 철도청이 아닌 홍익회가 관리하는지. 이런 대답을 들었어요. 우리가 지금은 철도청이지만 내년에는 철도공사가 될 거다, 정부에 공무원 정원이 정해진 상태라 올해는 직접고용을 못 했지만, 내년에 (철도공사가 되면) 당연히 직접고용할 거다. 케이티엑스를 1~2년 운영하고 말 것도 아닌데 우리가 너희를 단기고용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절차상 그런 거니 좀 기다려라, 철도공사가 되면 수당도 나오니까 미리 자격증도 따놓는 게 좋을 거다… 등.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 말을 듣고 실제로 철도운송산업기사 자격증을 딴 사람도 있어요.”
노동자들은 자신이 소속된 일터를 믿는다. 일터에 대한 신뢰는 일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을 낳는다. 홍익회가 관리하지만, 철도청에 속해 있다고 믿는 승무원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철도청이 철도공사가 되면 안정적인 정규 승무원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다음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거죠?
“2005년이 되면 당연히 철도공사 정규직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1년 뒤, 홍익회는 1기 승무원의 경력을 인정해준다면서 월급을 동결하고 2기 승무원의 월급을 깎았어요. 해가 갈수록 더해요. 지금 승무원으로 입사하면 최저임금 수준을 받습니다. 홍익회 소속이다 보니 승무원 기본 업무에 안전 업무가 없는 것도 문제였어요. 홍익회는 본래 열차 내 식품 판매 등 여객 편의 제공을 주력 사업으로 운영되는 곳이거든요. 안전 업무는 코레일이, 관광·유통·승무업 등은 케이티엑스관광레저(현 코레일관광개발)가 맡고 있으니, 승무원의 업무는 ‘서비스’가 전부라는 거죠. 승무원의 역할을 생각해보세요.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업무잖아요. 승무원이 직무 수행을 할 때 이건 서비스 업무, 이건 안전 업무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잖아요.”
―서비스와 안전 업무의 구분을 통해 승무원이 소속된 위탁업체가 계속해서 바뀌는 상황을 합리화한 것이로군요.
“승무원을 불법파견하기 위한 수단으로 업무 구분을 이용한 셈이죠. 불법파견이란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너희는 안전이 아니라 서비스 담당이라 파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더라고요. 철도공사 직원과 승무원이 함께 케이티엑스를 타는데, 서로 다른 회사 사람이니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도 들었어요. 철도공사는 유니폼 비용, 락커룸 이용비 등을 다 포함해서 승무원들의 월급을 홍익회로 지급했지만 홍익회는 승무원들의 월급에서 저 비용을 다 뗐어요. 철도공사에서 승무원들에게 성과급을 일괄적으로 지급했는데도 홍익회는 승무원들의 등급을 매겨 차등 지급을 했죠. 누굴 더 주는 게 아니고 기준 금액에서 깎는 방식이어서 차액이 남을 수밖에 없도록 말이죠. 거기서 남은 돈이 다 어디로 갔을까요? 1기가 입었던 승무원 유니폼은 2기 승무원한테 줬어요. 빡빡한 근무 일정에 휴가도 쓰지 못해 제비뽑기로 운 좋은 사람만 휴가를 가는 게 일상다반사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이 그야말로 깨알같이 반복되었네요.
“불합리한 일들이 자신과 상관없을 때에는 그냥 지나치기도 하잖아요. 내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홍익회라는 자회사에 고용되어 겪는 기본적인 불합리함은 둘째 치고라도, 안전 업무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싸우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에요. 업무상의 이런 불합리한 일들, 승무원이 안전 관련 업무를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려면 직접고용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 거죠.”
2004년 1월, 케이티엑스 승무원 채용 공고를 낸 주체는 홍익회였다. 2005년에 2기 승무원을 모집할 때의 주체는 한국철도유통이었다. 근무환경은 더 열악해졌다. 여전히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은 매년 위탁업체(홍익회→한국철도유통→케이티엑스관광레저)의 이름만 바뀌는 불안한 비정규직 신분이었다. 이는 그들
이 위탁, 외주, 도급, 위장도급과 같은 생경한 단어들과 친해지게 된 불행한 시간이기도 했다. 필요한 인력을 직접고용하지 않고 위탁업체를 두고 파견직으로 고용하는 행태는 노동유연화를 내세운 신자유주의가 낳은 병폐이기도 했다. 2006년, 코레일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던 승무원들의 소속을 한국철도유통에서 케이티엑스관광레저로 변경하려고 했다. 고용 기간 2년을 채워 정규직 전환 의무가 발생되기 전에 계약 주체를 바꾸기 위한 수단이었다. 반발한 승무원들은 파업을 벌였고, 코레일은 파업에 참가한 승무원 280명을 정리해고 했다.
김승하 전 케이티엑스 열차승무지부장이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코레일인재개발원에서 오은 시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젊은 여성 파업” 신기하게만 보더라
승무원들은 해고되었지만, 파업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거리로 나섰다. 쇠사슬을 감고 국회를 향해 행진하기도 했다. 그 쇠사슬은 여성과 비정규직에 대한 이중 차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철탑에 올라 농성하기도 하고 삭발, 단식 등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지난했다. 하루하루의 밀도가 높았는데, 오늘이 지나 내일이 왔는데도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투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였다. 연대가 없었다면 그 시기는 더욱 암담했을 것이다.
―그사이 생활과 생계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1~2년도 아니고 십몇년 동안,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면서 투쟁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2008년에 소송에 들어갔어요. 소송을 걸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소송까지 가지 않고 교섭을 통해 원만하게 해결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지친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생계가 중요하잖아요. 다들 살길을 찾기 시작하면서, 소송을 준비했어요.”
―1심과 2심에서 법원이 승무원들의 손을 들어줬잖아요.
“네, 그랬지요. 코레일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냈는데 코레일과 승무원이 고용 관계로 성립됐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어요. 홍익회가 노무대행기관에 불과하다는 걸 입증해야 한 셈이지요. 2010년 1심에서 이겨서 바로 재고용할 줄 알았는데 코레일 쪽에서 항소했어요. 다행히 이듬해 2심에서도 저희가 승소했어요. 승객 서비스와 안전 업무를 분리하기 어렵고, 이를 분리해 도급계약을 맺을 수 없다고 판단한 거죠. 코레일이 실질적인 사용자라는 판결이었죠.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승무원의 본래 역할을 찾을 수 있겠다고,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코레일 불법파견 인정한 1·2심
손바닥 뒤집듯 뒤집은 대법원
알고 보니 ‘양승태 사법농단’ 결과
피해 구제·판결 번복 방법 없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싸움 끝나고
코레일 소속 역무원으로 근무
이제 편안한 일상 돌아가고 싶지만
KTX 승무원 직고용 등 과제 남아
코레일 쪽에서는 곧바로 상고를 했고, 그사이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2015년 2월에야 대법원 판결이 났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승무원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화재 진압 및 승객 대피 업무는 이례적인 상황에만 필요한 조치”라는 대법원의 판결 문구는 김승하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소송에 쏟은 7년의 시간이 야속했다.
―오랜 시간의 투쟁이라 더욱 뼈아팠겠어요.
“안전 업무가 승무원 업무가 아니라는 말에 분노했어요. 홍익회가 저지른 만행조차 ‘독자적인 운영의 근거’라는 판결문을 읽고 이건 다분히 정치적인 판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대법원에서 패소하니 10년 가까이 싸워왔던 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어요. 1심에서 이긴 뒤 4년 동안 월급을 받아왔는데, 그게 총 8640만원이에요. 하루아침에 그 돈이 부당이득이 되었지요. 거기에 법정 이자까지 붙어 결국 1인당 1억원 이상을 반환하게 됐고요.”
눈앞이 캄캄했다. 투쟁을 함께했던 친구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시작한 싸움이 사람을 죽였다. 게다가 박근혜 정권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가장 막막한 시기였겠어요. 법적으로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으니까요.
“그 당시 제가 지부장이었어요. 대법원에서 졌다고 그냥 끝내버릴 수는 없었어요. 이건 결국 내 삶을 부정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법적으로도 네가 잘못했다는 말에 수긍해버리는 순간, 내가 지금까지 대체 뭘 하며 살았나 자책하게 될 것 같았어요. 하나의 선례가 되는 거잖아요. ‘걔들 10년 넘게 싸웠어. 근데 개인당 빚만 지고 쫄딱 망했대.’ 이런 사례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내가 죽기 전에 이 싸움이 끝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누군가가 나라면 그 일을 나라도 할 수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자,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마음먹었지요. 그때부터 정미정 총무와 제가 노조에서 상근을 시작했어요.”
지난 5월 희망의 빛이 들었다. ‘양승태 사법부’가 상고법원 설치를 두고 박근혜 정부와 재판거래를 했다는 의혹 문건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케이티엑스 승무원 사건’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사법부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원하기 위해 케이티엑스 여승무원 해고 소송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내용이었다. 코레일과 철도노조의 협상도 급물살을 탔다.
―그사이 다른 직장을 찾은 사람도 있잖아요. 거기서 이미 경력도 많이 쌓았을 테고요. 그럼에도 다시 돌아오겠다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들었어요.
“제가 여기에 청춘을 바쳤어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죠. 힘들게 싸워 약 13년 만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잖아요. 돈이 신념을 이길 수 없었던 거죠. 언론에서도 20대 젊고 예쁜 여성들이 머리띠를 매고 서울역에서 파업한다고 신기하게만 봤지, 정작 이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 제대로 관심 가진 적은 별로 없었어요. 이들이 안전 업무를 안 한다는 것이,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왜 고객들에게 문제가 되는지 다룬 기사도 거의 없었어요. 다시 돌아왔다는 건, 저희가 옳았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김승하 전 케이티엑스 열차승무지부장이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코레일인재개발원에서 오은 시인과 인터뷰를 하던 중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더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오랫동안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당장 가시적인 결과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죽기 전에 안 끝날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이 쌓이면 언젠가는, 후대에라도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당장 누리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이를 고마워하며 누리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가지 더 있어요. 싸움이 길어지더라도 분명 많은 분들이 기억해줄 거라는 사실요. 저희가 옳았기 때문에 이렇게 끝낼 수 없다는 믿음 하나로 버텼어요. 많은 국민들이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셨기에 여기까지 오는 게 가능했어요. 고맙습니다.”
김승하는 원래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넌지시 “대학 다닐 때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의 파업 집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자 “나는 대학 시절 그런 경험이 없어 연대해주러 오는 학생들 보면 참 신기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 그가 12년이 넘는 ‘장기투쟁’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동지가 있었기에, 자신이 옳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신자유주의의 피해자에서 사법농단의 피해자가 된 그의 인생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동지를 얻고 신념을 지킬 수 있었기에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나’들이 모여 ‘우리’가 되는 일은 근사하다.
그는 이제 편안하고 싶다고 말했다. 편안하다는 단어는 ‘편하고 걱정 없이 좋다’라는 뜻이다. 편안한 상태를 맞이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에게 편안함은 일상이지만, 편안함을 되찾기 위해 그처럼 일상을, 인생의 한 부분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끝나고 사진 촬영을 할 때 김승하가 말했다. “아직도 서울역에 가서 농성해야 할 것 같아요. 안 끝난 것 같아요.” 이 말에는 안도와 불안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일단락이 되었다고는 하나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들이 있다. 사법농단 재판이 아직 남았고 코레일의 승무원 직접고용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투쟁하면서 김승하의 나이 앞자리가 바뀌었다. 그사이, 그는 꿈을 잃었고 힘든 싸움 끝에 그 꿈을 다시 찾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모이고 모여 ‘다시’와 ‘처음’을 기어코 만나게 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 제자리를 되찾는 일은 나를 잊지 않은 사람, 나를 잃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김승하와 동료들은 다시 첫 출근을 한다. ‘다시’와 ‘첫’의 만남은 언제나 뭉클하다. 열차는 다시 달린다. 처음의 마음으로, 함께의 믿음으로.
오은 ▶시를 쓴다.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한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는 삶 대신 못하는 것을 채우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딴청을 부리고 딴 생각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 ‘딴’에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낀다.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등을 냈다. 가수 요조와 번갈아 누군가의 ‘요즘은’ 어떤지 물어보려 한다.
김승하를 만든 시간들
1981년 2살.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천진하게 놀았다.
2002년 23살. 승무원의 꿈을 키우던 대학 시절의 모습. 머지않아 13년에 이르는 기나긴 투쟁에 나서게 될 줄 이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2004년 25살. 케이티엑스 1기 승무원으로 입사해 열심히 일만 하던 시절의 모습. 특실 서비스 업무를 마치고 뿌듯한 마음으로 ‘셀카’를 찍었다.
2006년 27살.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이 파업에 돌입한 뒤 집회에 참여했다가 찍힌 사진. 차가운 현실과 싸우기 위해 강인해져야 했다.
2010년 31살. 코레일을 상대로 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1심 재판에서 승소한 직후 축하 전화를 받으며 눈물을 쏟았다.
2015년 36살. 대법원이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은 코레일 소속 근로자가 맞다’던 1심과 2심 법원의 판결을 뒤집던 날, 참담한 마음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