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7시 서울 서대문 작은 책까페 ‘레드북스’에서 ‘라이더들의 썰전’이 펼쳐졌다. 배달 노동자들의 안전과 권익을 위한 ‘라이더 유니온’ 출범을 준비하고 있는 준비모임이 연 행사였다. 사진 라이더 유니온 준비모임 제공
“엄청 추운 겨울이었어요. ‘한번에 한 곳’ 배달 규정이 안 지켜졌어요. 세 집에 배달할 햄버거를 들고 나왔는데, 마지막 집에서 배달이 늦었다고 카드를 바닥에 던지더라고요. 저를 보며 ‘고객과의 시간 약속도 못 지키니까 배달이나 하는 것’이라고 비아냥댔어요.”
한 전직 라이더가 배달을 하면서 겪었던 ‘진상’ 고객에 대한 사연을 털어놓자 객석에선 ‘공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용히 카드를 주워 긁고 영수증과 함께 건넸더니 ‘평생 배달이나 하라’며 문을 쾅 닫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평생 햄버거나 처먹어라’라고 대꾸가 나오더라고요.” 이번엔 객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14일 오후 7시 서울 서대문 작은 책까페 ‘레드북스’에서 ‘라이더들의 썰전’이 펼쳐졌다. 배달 노동자들의 안전과 권익을 위한 ‘라이더 유니온’을 내년에 출범하려는 준비모임이 연 행사였다. 이 행사를 기획한 박정훈(33)씨는 “배달 대행 기사들은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 유니온에 합류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차차 참여인원을 늘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1년9개월째 배달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박씨의 양 옆으로 전직 배달대행기사 이범석씨와 전직 맥도널드 라이더 서상도씨가 앉았다. 이들이 경험담에 객석에 자리를 잡은 배달 노동자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했다.
이범석씨가 경사가 가파른 계단 사진을 들어보이자, 객석에 앉아 있던 한 배달 노동자가 “저기 알아. 합정”이라고 단박에 소리쳤다. 박정훈씨가 악명 높은 경사로를 가리키며 “저 계단의 경사가 70도에 가깝다. 저길 배달하려면 네발로 기어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허벅지 터지는’ 배달의 추억은 곧 고장난 엘리베이터의 악몽으로 이어졌다. 이범석씨는 “배달지가 11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적이 있었다. 배달통에 다른 배달음식이 2개나 더 있어서 도저히 못 올라갈 것 같아서, 고객한테 전화를 걸었다”고 말했다. 이씨의 대처법은 ‘중간층에서 만나자’였다. 객석에서 또 웃음이 터졌다.
서상도씨는 좀더 협상에 능한 타입이었다. 배달지가 18층인데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상태였다. “‘걸어갈 순 있는데 올라가는 동안 감자튀김은 식고, 아마 콜라도 흘릴 것 같다. 괜찮으시면 내려와서 드시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죠.” 햄버거가 고팠던 고객은 18층을 걸어 내려와 근처 공원에서 햄버거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이씨는 2014년 가을부터 2015년까지 ㅍ배달대행업체에서, 서씨는 맥도날드 가맹점에서 2015년부터 약 1년간 배달일을 했다.
악천후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배달 노동자들은 날씨 이야기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서씨는 “겨울이면 오토바이 핸들에 손토시를 해놓는데 비가 오면 방수처리가 돼 있어도 젖어요. 손이 젖은 상태로 라이딩하면 손이 꽝꽝 얼죠.” 서씨의 경험담에 박정훈씨가 “겨울엔 따뜻한 커피 주문하는 고객들이 고맙다”고 얼른 추임새를 넣었다. 서씨는 “겨울에는 오토바이 핸들에 열선을 달아주면 좋은데 업체에서는 비용 문제라 안해준다”고 아쉬워했다.
교통 사고와 안전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는 화두였다. 박정훈씨가 넘어진 오토바이 사진을 들어보이며 사고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박씨는 “배달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겨울 빙판길에서 넘어졌던 사진”이라며 “지금도 교차로 지날 때면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고 말했다. 서씨가 말을 보탰다. “어느 겨울에 천천히 유턴을 하는데 쌓인 눈에 넘어져 복숭아뼈 부근 살점이 떨어졌다. 너덜너덜한 살점을 보여주며 산업재해 신청이 가능한지 물었는데, 업체 쪽에서 ‘산재 신청하면 재계약 안해줄텐데’라고 말해서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 목숨값이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날 ‘라이더 썰전’에선 라이더들의 권익을 신장해달라는 요구가 담긴 기사에 실린 ‘악플’을 공유하기도 했다. 배달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악플들은 정확한 지표를 제시했다. “학창시절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이 배달맨하지”, “힘들면 공장에 들어가라”, “취업이나 해라” … 음악작업을 하면서 세탁물 배달일을 하는 서씨는 “친척들이 뭐하냐고 물어보면 ‘그냥 음악한다’고 답한다”며 “배달일 한다고 하면 우선 무시부터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다. 객석에 앉아 있던 배달노동자들도 “부모님만 알고 있다”, “애초 배달 한다는 얘기를 안한다”고 말을 보탰다.
이날 ‘화끈한 썰전’에선 음악을 만들며 생계를 위해 오토바이 핸들을 잡는 배달 노동자 2명이 ‘한숨’ ‘오르막길’ 등 노래를 선보였다. 배달 노동자의 힘겨운 일상을 위로하는 노래다. 박정훈씨는 “‘플랫폼 노동’인 배달 대행기사의 위험성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향후 4~5년 안에 라이더 유니온의 필요성이 대두될 것”이라며 “그 기간 동안 열심히 준비해 배달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장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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