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자신의 사무실 앞에서 대법 기밀자료 무단 반출과 파기 혐의와 관련된 압수수색이 끝난 뒤 입장발표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왜 그랬을까. 차관급 고위법관 출신 유해용 변호사가 잇따른 압수수색 영장 기각을 틈타 ‘사법 농단’ 의혹 증거 수만건을 대놓고 폐기하자, 그 의도와 법률적 득실을 두고 여러 분석이 나온다.
유 변호사는 지난 5일 ‘해당 자료들을 없애지 않겠다’고 검찰에 서약서까지 냈지만, 영장 기각 소식이 전해진 이튿날 곧바로 증거들을 없애버렸다. 그는 11일 기자들에게 “법원도 (영장을 기각하며)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 폐기했다”고 주장했다. 또 “관련 자료를 갖고 있는 한 검찰이 끊임없이 압박할 것이라는 스트레스가 극심해서 부득이 (파기했다)”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도 했다.
이와 관련해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일부만 포함돼도 이를 없애는 것은 ‘증거인멸죄’가 안 된다는 판례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 같다”면서도 “죄가 안 된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에 다른 후폭풍을 생각하지 못하고 유 변호사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검찰 관계자도 “(파기한) 자료 중에는 피의자인 유 변호사 본인의 범죄 자료도 있지만, (대법원 윗선 등 타인의) 직권남용 범죄에 대한 자료도 다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형사사건 증거를 인멸한 죄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번 사안이 증거인멸죄의 성립 여부를 뛰어넘어 사법부 전체에 대한 신뢰 문제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유 변호사가 파기한 자료의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증거인멸을 방조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죄가 안 된다”고 두 차례나 영장에 제동을 걸었는데, 유 변호사 스스로 해당 자료들이 ‘감춰야 할 만한 범죄단서’라는 사실을 시인한 꼴이 됐다.
유 변호사가 파기한 자료들이 어떤 내용이길래 그가 긴급체포나 구속 가능성까지 감내하며 일을 벌였는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검찰은 해당 자료에 △통합진보당 관련 사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사건 △전교조 관련 사건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 박채윤씨 특허소송 등이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유 변호사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선임·수석재판연구관’을 지냈다. 대법원에 올라온 모든 사건은 대법관에게 보고되기 전 그의 손을 거치게 된다. 서울지역 한 변호사는 “(재판 거래) 내용이 얼마나 심각하면 25년 경력의 고위법관 출신 변호사가 불리한 정황에도 저렇게 증거인멸까지 하겠느냐”고 말했다.
법원의 이중잣대도 문제로 꼽힌다. 앞서 대법원은 유 변호사가 빼돌린 것과 동일한 ‘재판연구관실 보고서’ 등을 검찰이 요구하자 “대외비에 준하기 때문에 외부에 제공해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유 변호사의 외부 유출에 대해선 “부적절하지만, 죄가 되지 않는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김양진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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