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원 전시관 안에 법관의 양심과 독립 등을 명시한 헌법 제103조가 적혀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차관급(고법 부장)인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퇴직하며 재판기록 수만 건을 뭉치째 들고 나갔다는 의혹 관련해 법원이 “죄가 안된다”며 압수수색 영장을 무더기 기각했다. 이 전관 변호사는 앞선 영장 기각 직후 해당 자료를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법 박범석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유해용(사법연수원 19기) 전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현 변호사)에 대해 “대법원 재판자료를 반출해 소지한 것은 대법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부적절한 행위이나, 죄가 되지는 않는다”, “이 자료를 수사기관이 취득하면 재판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할 수 있다” 등 이유로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했다. 공무상 비밀누설,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절도 등에 대한 형사책임은 부인한 채 “부적절한 행위”로 정리하며 수사를 막은 것이다.
검찰은 “수사기관이 취득하면 재판의 본질적인 부분을 침해하는 것이고, 민간 변호사가 취득하는 것은 아무런 죄도 안된다는 것”이라며 “재판의 본질적인 부분(침해)은 불법반출로 이루어진 것이고, 수사는 그 진실과 책임소재를 가리자는 것인데, 재판과 관련한 어떤 불법이 있더라도 수사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라고 반발했다.
특히 이번 영장을 기각한 박 부장판사는 2014년 유 변호사가 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할 당시 재판연구관으로 일한 바 있다. 선임·수석재판연구관은 일반 연구관들의 평정을 담당하고 업무를 총지휘하기 때문에, 사실상 ‘상급자’의 지위다. 서울지역의 한 판사는 “이 경우 영장판사 스스로 ‘회피’(‘재판을 불공정하게 진행할 염려’가 있는 법관이 해당 재판을 맡지 않는 것)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법원이 이제껏 ‘외관의 공정성’이라도 지켜왔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포기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번 영장 기각은 3일간의 ‘장고’ 끝에 나온 결정이다. 검찰은 지난 5일 유 변호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 박채윤씨 특허소송 관련 대법원 재판자료를 청와대에 넘긴 의혹에 대해 사무실을 압수 수색(1차)을 하는 과정에서 반출 재판자료를 발견하고, 별도의 압수수색 영장(2차)을 청구했다. 지난 6일 기각되자 다음날 재청구한 영장(3차)에 대해 사흘 만에 ‘기각’ 판단이 나온 것이다. 지난 8일 근무한 2명의 영장전담 판사는 10일 이후 결정한다는 입장을 내놨다고 한다. 통상 서울중앙지법의 압수수색 영장 심사는 영장전담 판사가 맡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이틀간 판단을 미루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새 유 변호사는 관련 자료를 파기할 시간을 벌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이날 3차 영장 기각이 알려진 직후, 유 변호사가 해당 문건과 저장된 컴퓨터를 파기했다고 밝혔다. 대법원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이날 저녁 6시께 유 변호사가 “지난 6일(2차 영장 기각 직후) 출력물 등은 파쇄했고, 컴퓨터 저장장치는 분해해 버렸다”고 답했다고 했다. 유 변호사는 지난 5일 1차 영장 집행 당시 검찰 관계자에게 “해당 자료를 훼손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서약서까지 써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유 변호사 쪽은 “자신에게 수사가 집중되는 상황에서 심리적 부담감을 느낀 것 같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보고서 등은 대부분 파쇄했다고 전달받았고, 잔여 문건이 있다고 해서 확인 중”이라고 설명했다.
유 변호사가 반출한 뒤 파기했다고 주장한 문건에는 각종 재판거래 의혹 관련 문건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하거나 은닉’한 경우에 해당돼 증거인멸죄가 성립할 수도 있다. 이날 검찰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이름으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증거 인멸 행위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