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원 전시관 안에 법관의 양심과 독립 등을 명시한 헌법 제103조가 적혀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 박채윤씨 소송기록의 청와대 ‘상납’ 의혹 수사가 대법원 재판기록 반출 수사로 확대되고 있다. 재판연구관실을 총지휘했던 전관변호사의 전방위적 문건 유출 의혹에 일선 판사들도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연구관 보고서 유출’에 대한 명확한 판례가 정립되지 않은 가운데, 이참에 퇴직 법관이 재판기록을 ‘당연하게’ 챙겨가는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해용(사법연수원 19기) 변호사는 올해 2월 퇴직하면서 선임·수석재판연구관 근무(2014~16년) 시절 재판연구관 보고서 등 대법원 재판기록 수만 건을 빼돌린 의혹을 받는다. 지난 7일 한차례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되자, 검찰은 공무상 비밀누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형사사법전자화촉진법 위반 등 혐의로 영장을 재청구했다. 특히 검찰은 선임연구관 근무 시절 유 변호사가 민사사건 신건을 담당하는 연구관들에게 “작성한 보고서를 모두 유에스비에 담아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뒤 수천건씩 확보했다는 진술을 얻어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유 변호사가 퇴직하며 이 문건을 고스란히 갖고 나갔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또 일부 보고서는 출력물 형식으로 반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 내부에서는 ‘연구관 보고서 유출 행위’에 대해 공공기록물법위반죄나 공무상 비밀누설죄가 성립하는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아직 대법원 판결이 안나온 경우 ‘공무상 비밀’은 손쉽게 인정될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이미 판결이 확정된 경우 ‘공무상 비밀’로 보기 쉽지 않다는 견해도 있지만, 법원 내부에도 공개가 제한되는 문건인 데다, 비공개로 진행되는 대법관들 합의 과정을 엿볼 기초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충분히 성립한다는 해석도 있다. 앞서 법원행정처가 검찰에 재판연구관 문건을 임의제출할 수 없다는 근거로 삼은 대법원 내부지침에도 “연구업무나 사법연수원 교육 등을 제외한 경우 재판연구관 보고서는 선고 이후에도 파일, 인쇄본 등 어떤 형태로든 일부도 대법원 외부에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규정돼 있다. 검찰은 내부 직원이나 판사가 문건을 유출해 전달해줬을 가능성도 들여다보고 있다. 이 경우 유 변호사는 유출받은 당사자가 된다.
연구관 보고서 등이 ‘공공기록물’에 해당하는지를 두고도 의견은 갈리지만, ‘법원 등에서 생산된 모든 기록물’이 관리 대상인 점, 보고용 문건의 경우 별도의 ‘연구관보고서등록시스템’에 정식 등록되는 점 등에 비춰 ‘공공기록물’에는 해당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비슷한 사례에서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죄가 인정된 하급심 판례도 있다. 춘천지법은 10여년 넘게 범죄일람표 사본과 수사기록을 출력해 무단으로 반출한 경찰관에 대해 지난 2014년 유죄로 판단한 바 있다. 서울지역의 한 판사는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록물 반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엄히 물은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고 짚었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여지가 있다는 점은 법조인들 대부분이 중지를 모으는 지점이다. 재판기록에는 주민등록번호, 주거지 등 광범위한 개인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은 ‘업무상 알게 된 개인 정보를 누설’하거나 ‘영리 또는 부정한 목적으로 제공받은’ 경우 최대 징역 5년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이번 기회에 재판연구관실을 지휘하는 수석·선임연구관을 지낸 뒤 퇴직하면서 자신이 작성하지 않은 보고서 수만 건을 유출한 경위를 명쾌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따른다. 지방의 한 부장판사는 “판사가 법원을 옮기면서 재판기록을 옮겨가는 것과, 민간인이 영업 목적으로 반출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며 “연구관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에서 일반 판사들은 확보하기 어려운 기록을 챙긴 뒤 민간인 신분으로 반출한 행위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언학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 6일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죄 등이 성립되지 않는다”며 한차례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했다. 이에 검찰은 지난 7일 밤 영장을 재청구했지만, 영장판사들이 오는 10일까지 판단을 미뤄두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통상과 달리 법원이 청구 당일 발부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며 심사 지연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내보였다. 한 판사는 “통상 증거인멸이 우려되는 사안의 경우 법원도 최대한 빨리 판단하는 편인데, ‘사법농단’ 수사는 유독 신중히 접근하느라 ‘장고’하는 것 같다”고 짚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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