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법원의 무죄 판결을 규탄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비서로서) 일할 때 거절하거나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저로서 그때 머뭇거리고 어렵다고 했던 건 저한테는 최대한의 방어였다. 최대한의 거절이었고, 지사님은 그걸 알아들으셨을 것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한 김지은(33)씨가 지난 3월 방송에 출연해 자신은 안 전 지사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는 권력관계에 놓여 있었다며 털어놓은 말이다. 김씨의 말은 거절의 의사 표시일까 아닐까?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피해 당일 저녁 함께 와인바에 갔고”, “귀국 후 안 전 지사와 같은 헤어숍에 갔다”는 등의 정황을 들어 ‘최대한 방어’했다는 김씨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해자가 ‘거절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고, 결국 김씨는 입증에 실패했다.
지난 14일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가 내놓은 안 전 지사의 무죄 선고는 권력형 성폭력을 판단하는 우리 사법체계가 얼마나 취약하고 후진적인지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줬다.
재판부는 핵심 쟁점이었던 ‘업무상 위력’이 행사됐는지 판단하면서, 통상의 성폭력 사건처럼 피해자의 거절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안 지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위력을 행사했는지 등에 주목했다. 강간 혐의는 ‘항거 불능’ 상태에 이를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하고, 준강간은 술에 취해 ‘정신을 잃어야만’ 인정된다는 식의 판단과 다를 바 없었다. 지속적인 권력관계가 성폭력으로 연결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도식화된 ‘물리적 저항이나 피해 입증’을 요구한 셈이다. “그럼 은장도라도 빼 들었어야 했다는 거냐”는 여성계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재판부는 ‘위력’이라는 행위 수단을 해석하면서 무형의 위력은 보지 않고 유형의 위력인 폭행·협박만으로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집회를 열어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무죄 판결을 규탄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재판부가 “현행법으로는 안 전 지사를 처벌하기 힘들다”며 법체계의 미비점을 지적한 것을 두고는 “입법부에 떠넘기기”라는 비판도 나온다. 사법부가 적극적인 법해석으로 판례를 변경해 변화를 끌어내는 경우도 잦은데, 유독 성폭력 범죄에는 협소한 시각을 유지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여성계에서는 ‘노 민스 노(No Means No) 룰’의 입법화가 시급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보수적인 사법부의 법해석이 ‘미투 운동’이 추구하는 양성평등의 지향성을 가로막고 있으니, 좀 더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 민스 노 룰’은 어떤 환경이든 상관없이 상대방이 거부 의사를 드러냈는데도 성관계가 이뤄졌을 때 이를 처벌하는 내용이다. 미국 일부 주와 캐나다, 유럽의 나라들은 성폭행 범죄에 대해 ‘노 민스 노 룰’을 이미 법제화했다.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는 한발 더 나아가 상대방의 적극적 동의가 없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규정이다. 스웨덴은 최근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명시적인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간주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를 변호하는 한 변호사는 “성관계 도중이라도 상대방이 그만하라고 했을 때는 멈추는 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태도”라며 “노 민스 노 룰이 입법화되면 물리적이고 적극적 저항만이 저항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의 책임연구원도 “상담하다 보면 할 수 있는 만큼의 거부 의사를 충분히 밝혔는데도 가해자가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의 거절 의사 표시에 반드시 귀 기울이는 게 상식이 돼야 한다”며 노 민스 노 룰의 입법화를 역설했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판결 이후 관련 법률인 형법 개정 움직임이 일고 있다. 송기헌 민주당 법사위 간사는 “지금 법으로는 (위력에 의한 성폭행을) 증거상 인정하기 어려운 구조”라며 “이미 제안된 형법 개정안이 있으니 불합리한 점은 빨리 개정하는 등 입법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도 법 개정에 동의하고 있다. 윤영석 당 대변인은 “안 전 지사 판결에서 현행법이 미비해 처벌이 어렵다는 취지를 담고 있어, 법적인 미비점을 보완할 것”이라며 “변화된 시대 상황에 맞춰 여성 인권을 보호하고 성폭력·성추행을 막을 수 있는 방향으로 법제사법위원회·여성가족위원회 등 상임위에서 법 개정이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른미래당은 형법 제297조 개정을 위해 국회 입법조사처에 의뢰서를 제출했다. 김수민 의원은 “형법의 강간죄에 해당하는 범주에 ‘명시적 동의 없이’ 혹은 ‘상대방의 부동의 의사에 불구하고’ 등을 추가하고, ‘강간'이라는 단어 대신 ‘성폭행’으로 표현을 바꾸는 방향으로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행 형법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법 개정안은 ‘미투 운동’이 활발하던 상반기에도 있었다. 지난 3월 천정배 민주평화당 의원이 비동의 간음에 대한 해석을 폭넓게 할 수 있도록 하는 형법(제303조) 개정안을, 지난 4월에는 같은 당 최경환 의원이 강간죄의 성립 범위를 확대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형법(제297조)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지금껏 해당 상임위인 법사위에서 제대로 된 논의는 없었다.
앞서 지난 3월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국회 여성가족위에 출석해 형법 개정을 약속한 바 있다. 정현백 장관은 김승희 자유한국당 의원이 ‘동의 없이 성행위가 이뤄진 것은 강간죄냐’라는 질문에 “강간의 범주를 넓게 규정해서 범죄로 보아야 한다”며 “향후 적극적으로 법 개정을 추진할 예정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법무·검찰개혁위도 지난 6월 “‘폭행 또는 협박’을 강간죄 성립 요건으로 규정한 형법 297조는 불평등한 권력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피해 상황과 맥락을 간과해 피해자 권리 보장을 가로막는다”며 “‘피해자의 거부 의사’를 강간죄 처벌 기준으로 삼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장수경 이정훈 김태규 송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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