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성 전 법원행정처장(왼쪽)과 권순일 전 행정처 차장. <한겨레> 자료사진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대법원’ 사이의 ‘재판 거래’ 의혹이 대법원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불가역적’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2013년 12월 당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차한성 법원행정처장(대법관·2014년 3월 퇴임)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휴일 오전 비서실장 공관으로 불러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을 늦춰달라고 요구한 정황이 외교부 회의자료 등을 통해 확인되면서, 이제 검찰은 이런 요구가 대법원장이나 주심 대법관에게 전달돼 실행됐는지 규명해야 하는 상황이다. 실제 재판이 박근혜 정부 내내 늦춰지면서 5년 이상 지연돼 사실상 실현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4일 검찰은 3자 회동 자리에 행정처장이던 차 전 대법관이 “대법원을 대표해서 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필요한 자료를 충분히 갖고 있다. 외교부는 자료 보전에 굉장히 철저한 부서”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김 전 실장과 차 전 대법관이 만난 시점은 강제징용 사건 ‘심리불속행 기각’(심리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을 할 수 있는 기간(대법원 접수로부터 4개월)의 만기를 목전에 둔 때였다. 법조계에선 2012년 대법원이 이미 배상 책임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 판례에 따라 심리불속행으로 재판이 쉽게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검찰은 당시 회동 목적과 관련해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2012년 대법원 판결 취지대로 ‘전범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확정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 확정을 지연해주고, (2012년 판례 변경을 위해) 해당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돌려서 판결을 번복해줄 것을 요청한 것인지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3자 회동 직후 심리불속행 기각을 할 수 있는 기간이 끝나면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신일철주금 등 전범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낸 사건은 장기 표류하기 시작했다. 법원행정처 문건을 보면 “정부가 대법원의 신중 처리를 요망한다. 재판 연기 방안을 지지한다”(2014년 11월 기획조정실) “신일철주금 사건에서 외교부의 입장을 반영했다”(2015년 11월 사법지원실)며 청와대의 요구를 직간접으로 수용했음을 내비쳤다.
현직 대법관이 직접 대통령 비서실장의 ‘카운터파트’로 나섰다는 점도 ‘재판 거래’ 실현 가능성에 무게를 더한다. 행정처장은 재판 업무를 맡지 않지만 대법관회의에 참석하는 등 대법원장과 다른 대법관들을 상시적으로 접촉한다. <한겨레>는 3자 회동과 관련해 차 전 대법관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 행정처는 청와대로부터 어떠한 요청도 받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청와대가 행정처, 혹은 징용 사건 재판부 등에 판결 파기나 전원합의체 회부 등 요청을 했는지 여부에 대해 아직 확인된 바 없다”고 했다.
한편 검찰은 2013년 9월4일 권순일(현 대법관)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정다주 기획조정실 심의관과 청와대를 방문한 사실도 확인했다. 이튿날 대법원에선 통상임금 소송 공개변론이 예정돼 있었다. 청와대 방문 당일 대법원에서 열린 공개변론 리허설에서 대법원은 노동자 쪽 대리인의 파워포인트 자료에서 박근혜 대통령 얼굴이 등장하는 장면을 삭제할 것을 요구해 논란이 됐다. 대법원은 “당시 권 대법관은 국제행사 관련 대통령 오찬 계획 설명을 위해 청와대를 방문했다. 홍경식 민정수석에게 관련 서류만 전달했을 뿐 다른 얘기를 나눈 바 없다”고 해명했다. 현소은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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