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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법농단 후폭풍…사법부 하나회 ‘민판련’ 시대가 저문다

등록 2018-08-02 15:20수정 2018-08-02 20:51

법원 내 최대 엘리트 연구모임 ‘민사판례연구회’
대법원장 2명, 대법관 17명, 헌법재판관 3명 배출
양승태 대법원 시절 대법원장-대법관-행정처 요직 채워
사법 농단 의혹 불거지며 줄줄이 수사대상 올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대법원장 2명에 국무총리 1명, 대법관 17명, 헌법재판관 3명을 배출한 엄청난 ‘서클’이 있다.

애초에는 순수 학술 모임으로 출발했으나, 회원 중 현직 법관의 비율을 늘린 결과 한때 사법부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세력으로 변모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관 14명 가운데 무려 8명이 이 모임의 전·현 회원으로 채워진 적도 있다. 법조인들에겐 익숙하지만 바깥세상에선 생소한 이름, ‘민사판례연구회’(민판련) 이야기다.

이 민판련이 최근 새삼스레 주목받고 있다.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는 ‘사법 농단’ 의혹의 중심에 이 모임 전·현직 회원들이 다수 포함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이들은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면 조사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사태의 정점에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상당 기간 민판련 회원으로 있다가 탈퇴했다.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하던 2015년 전후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병대 전 대법관은 올해도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사법 농단의 ‘실무 총책’으로 의심받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바로 위가 박 전 처장이었다. 대법원 특별조사단에 임 전 차장이 사용했던 컴퓨터 제출을 거부하다 경질된 김소영 전 법원행정처장(현 대법관)도 이 모임의 구성원이다.

‘양승태 법원행정처’의 핵심 요직이었던 사법정책실장과 기획조정실장을 모두 거친 이민걸 대법원 사법연구, 그의 뒤를 이어 사법정책실장을 지낸 한승 전주지방법원장과 심준보 서울고법 부장,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댓글 사건’ 상고심 판결 당시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던 홍승면 서울고법 부장이 모두 민판련에 적을 두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재판 개입’ 의혹을 받는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 문건은 이 모임 회원인 정다주 기획조정심의관(현 울산지법 부장)이 만들었다. 이 무렵 임 전 차장의 지시로 문제의 문건이나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난 법원행정처의 박상언 전 기획조정심의관과 김민수 전 기획제2심의관, 노재호 인사제1심의관도 모두 민판련 회원이다.

양승태 대법원에서 민판련은 절정기를 맞았다. 양 대법원장을 비롯해 차한성, 양창수, 민일영, 박병대, 김용덕, 김소영, 김재형 대법관까지 8명의 현직 대법관이 민판련 전·현 회원이었다. 전원합의체에 참여하는 대법관이 13명(법원행정처장 제외)이니, 판결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숫자가 민판련 회원들로 채워졌던 셈이다.

이 시기 법원행정처가 ‘민판련=대법원’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가 있다. 지난달 31일 법원행정처가 추가 공개한 문건 196건 중에는 행정처 기획조정실이 2015년 9월17일 작성한 ‘민판연 관련 대응방안 검토’ 대외비 문건이 있다. ‘사법부 하나회 민사판례연구회 해부’라는 제목의 한 언론 보도가 나온 직후, 기조실은 보도 배경과 대법원에 미칠 영향, 대응방안을 에이(A)4 5쪽에 걸쳐 분석했다.

내용은 충격적이다. “주요 보직 독점, 사조직화, 현 대법원장님 체제 하 개선 없음 등은 기본적으로 사법부 부담 요소”라고 분석한 뒤, △행정처 고위 법관 탈퇴 △행정처 소속 법관 일괄 탈퇴 △법원장 포함 일선 고위 법관 전원 탈퇴 방안을 검토했다. 심지어 “우리법연구회 출신 등으로부터 비판 여론 대두 가능성”, “국제인권법학회 동향 파악 필수”, “처장님 상대 탈퇴 의사 표명 강권 가능성”, “탈퇴하지 않은 대법관님들에게 부담” 등의 표현까지 등장한다. “외부의 공격을 방어할 여건도 일부 조성”됐다는 분석에 이르면 당시 법원행정처와 민판련의 ‘동일체’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문건은 “민판련에 판사 출신 아닌 변호사·검사 대거 영입, 지방대학 출신 및 초임지 지방권 법관을 신입회원으로 받도록 한다”는 해결 방안도 내놓았다. 전국의 사법행정을 책임져야 할 법원행정처가 특정 연구모임의 운영 방식을 대신 검토한 것이다.

이런 행태는 당시 법원행정처가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정책에 비판적이던 국제인권법학회 소속 법관들을 뒷조사하고 ‘탈퇴 공작’을 벌였던 것과 대비된다. 문건 작성 당시 행정처장은 박병대, 기획조정실장은 이민걸, 기획조정심의관은 박상언, 기획제2심의관은 김민수였다. 모두 민판련 소속이다.

민판련의 과거사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 대법관·감사원장을 지낸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모두 회원이었고, 전직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김앤장의 이재후 대표변호사,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장(전 서울대 교수)도 모두 민판련 역사에 족적을 남긴 회원들로 꼽힌다.

민판련은 1977년 한국 민법학계의 대부로 평가받는 고 곽윤직 서울대 법대 교수와 그 제자들이 만들었다. 꾸준히 발간해온 학술지 <민사판례연구>는 올해 제40집을 낼 정도로 질과 양 모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명단을 처음 공개한 2010년 이전에는 폐쇄적으로 모임을 운영한 탓에 ‘사법부의 하나회’로 불리기도 했다. 육사 출신 정치군인들의 모임인 하나회를 닮았다는 뜻이다. 민판련은 학계와 법조계를 망라한 최초의 학술 단체를 표방하면서 해마다 극소수의 현직 법관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는데, 독특한 선발 방식과 회원 명단 비공개로 선망과 질시를 동시에 받았다. 신입회원은 ‘서울대 법대·대학 재학 중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 성적 최상위권’을 동시에 충족하는 현직 법관 가운데 기존 회원의 추천을 받아 선별 입회시켰다고 한다.

당시 한 해 2~3명에 불과했던 신입회원들은 ‘선배 법관’ 회원들의 보살핌 속에 성장했고, 이 인맥이 사법부 요직에 두루 자리 잡으면서 막강한 ‘파워 블록’을 형성했다. 판사들 사이에서 “민판련 회원이라야 법원행정처도 가고 대법관도 바라볼 수 있다”는 푸념이 나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랬던 민판련의 여러 회원이 이제 검찰 수사를 목전에 두게 됐다. 수사 결과에 따라 처벌받는 회원이 나올 수도 있다. 한 법관 출신 변호사는 2일 “사법부 내부의 권력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번 사건은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라며 “법원 내 민판련의 위상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게 됐다”고 평가했다.

강희철 선임기자, 김남일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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