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조선일보>에 상고법원 홍보를 위한 설문조사와 좌담회, 특집기사 등의 게재를 주문하면서 그 대가로 10억원의 법원 예산을 광고비로 지급하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행정처가 ‘기사 거래’를 시도한 것으로, 검찰 내부에선 ‘국고횡령 예비’ 혐의로 수사할 사안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농단’ 의혹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최근까지 조선일보는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재판 거래는 없었다’며 문건 공개에 반대하는 취지의 보도를 해왔다.
■ 칼럼 대필 및 보도 계획 법원행정처가 31일 추가 공개한 ‘조선일보를 통한 상고법원 홍보전략’ 문건(2015년 4월25일 기획조정실·사법정책실 작성) 등을 보면, 당시 행정처는 조선일보를 통해 상고법원을 집중 홍보하기로 하고 조선일보 쪽에 전국 변호사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 지상 좌담회, 조선일보 내부 필진의 칼럼과 외부 기고문 게재 등을 제안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건은 특집기사를 임시국회 개원 직전인 2015년 5월 넷째 주부터 6월 첫째 주 사이에 집중 게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문건은 설문조사의 경우 “(서울지방변호사회보다) 조선일보를 주체로 실시하는 방안이 설문조사의 성공 가능성을 확보하고 조사 결과의 효과적인 홍보에 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어 “조선일보를 조사 주체로 할 경우, 설문조사기관에 지급할 용역대금의 지원이 필요하다. 조선일보에 상고법원 관련 광고 등을 게재하면서 광고비에 설문조사 실시대금을 포함해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건에는 “(법원 예산 가운데) 일반재판운영지원 일반 수용비 중 사법부 공보홍보 활동 지원 세목으로 9억9900만원이 편성돼 있다”며 구체적인 지출 세목까지 적시돼 있다.
조선일보가 상고법원 설문조사 결과를 보도한 적은 없다. 다만 상고법원 보도와 관련해 협찬금·광고비 등이 대법원에서 조선일보로 넘어갔는지는 향후 검찰이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검찰 관계자는 “행정처의 계획대로라면 국고횡령 예비 혐의로 수사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했다.
문건은 또 설문조사 기간을 미리 공지하지 않고, ‘상고법원 설치 찬성’이 60% 이상 나오면 바로 조사를 중단하며, 지역별로 가중치를 달리해 반대 입장의 반영 비율을 낮추려고 하는 등 설문조사 왜곡까지 계획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법원이 상고법원 추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여론조작 기획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건은 2015년 5월26일께 게재를 목표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사회를 맡아 법조계와 사회 원로를 상대로 지상 좌담회를 여는 방안을 계획해 이를 조선일보에 제안하기로 했다. 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은 좌담회 참석 후보는 물론, 좌담회 진행의 구체적인 순서와 발언 내용, 논의 방향까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행정처가 같은 해 5월6일 만든 ‘조선일보 방문 설명자료-상고제도 개선을 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 문건도 4월25일 문건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어, 이런 내용이 모두 조선일보에 제안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같은 해 4월14일 행정처 기획조정실이 작성한 ‘상고법원 관련 언론 지상 좌담회 시행 방안’ 문건도 조선일보를 통한 지상 좌담회를 상세히 계획하면서, 좌담회에서 참석자들이 발언할 내용을 준비하기 위해 당시 이아무개 사법등기국장을 팀장으로 행정처 심의관들이 대거 참여하는 실무준비팀(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기로 했다.
문건은 이와 함께 당시 임시국회가 상고법원 설치법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조선일보의 기명 칼럼과 ‘태평로’ 또는 ‘데스크에서’ 등의 칼럼을 통해 상고법원에 우호적인 칼럼을 게재할 것을 조선일보에 제안하기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집필진에 관련 자료 및 집필 내용에 관한 기초 보고서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같은 해 5월4일 사법정책실이 작성한 ‘조선일보 홍보전략 일정 및 콘텐츠 검토’ 문건은 ‘기사 콘텐츠’라는 항목에서 상고제도 개선 필요성, 상고법원안 내용, 대법관 증원론의 문제점, 상고법원 판사 임명 방안, 외국 사례 등을 소개하고 있다.
■ ‘상고법원 찬성’ 보도 쏟아져 조선일보가 상고법원에 처음부터 우호적인 보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상고법원과 삼권분립’(2015년 1월17일)이라는 제목의 칼럼은 여야 의원 168명이 발의한 상고법원 법안을 “입법과 사법의 ‘불륜’”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에 행정처는 곧바로 ‘상고법원 입법추진동력 붐업(boom-up) 방안 검토’ 문건(2015년 2월1일)을 통해 “보수 언론의 일부 부정적 보도가 공식 입장으로 오인된다”며 이 칼럼을 거론한 뒤, 이진강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등의 상고법원 찬성 기고문 게재를 추진한다는 대책을 내놓는다. 실제 문건 작성 직후인 2월6일 이 전 회장 명의로 ‘상고법원이 필요한 이유’ 기고문이, 4월13일에는 오연천 전 서울대 총장(전 사법정책자문위원장)이 쓴 ‘대법원 정상화를 위한 출발점, 상고법원’ 기고문이 조선일보에 실렸다. 특히 오 전 총장 기고문은 행정처가 칼럼 게재 전에 작성한 내용과 ‘토씨’까지 같아 ‘대필’ 의혹이 제기됐다.
행정처가 그해 4월 말과 5월 초 조선일보 활용 전략을 구체화한 문건들을 작성한 직후인 5월19일부터 6월 초까지 조선일보 지면에는 상고법원 관련 기사와 칼럼, 기획보도가 이어졌다. 특히 5월28일 1면과 3면에 걸친 기획보도는 ‘상고법원 논의, 국민입장에서 보라’는 제목으로 “대법원에 (사건이) 연 3만7000건이 쏟아진다”고 지적했다.
같은 해 9월20일치 행정처의 ‘조선일보 보도요청 사항’ 문건은 “상고심 사건의 소가 총액과 당사자 총수에 관한 기획보도”를 요청하면서 △연간 접수되는 상고사건 소송물가액 5조원(대구시 1년 예산 6조원) △5조원이 자본시장에 풀릴 경우 경제적 이익 1500억원 △연간 상고사건 당사자 수 12만명(충남 논산시 인구) △비행장 소음 손해배상 소송, 해고무효 소송 등을 사례로 제시했다. 문건 내용은 ‘대법관 ‘월화수목금금금’ 일해도 벅찬데…상고법원 표류?’ 기획기사(10월21일)에 고스란히 기사화됐다. 재판 기록이 사람 키만큼 쌓인 고영한 대법관 집무실 사진이 기획기사에 함께 실리기도 했다. 대법관 집무실 공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어서 당시에도 상고법원 도입에 행정처가 ‘올인’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조선일보’라는 표현이 제목에 들어간 문건은 ‘조선일보 상고법원 기고문’ ‘조선일보 칼럼’ ‘조선일보 기고문’ ‘조선일보 첩보보고’ ‘조선일보 홍보전략’ ‘조선일보 방문설명 자료’ ‘조선일보 보도요청 사항’ ‘조선일보 기사 일정 및 콘텐츠 검토’ 등 9건에 달한다. 이와 관련해 조선일보는 이날 입장문을 내어 “법원행정처 문건은 행정처가 일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조선일보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한편, 행정처가 비공개 문건 추가 공개를 예고한 당일인 31일 조선일보는 그간 보도 태도와 달리 ‘양승태 행정처, 재판 청탁 국회의원 명단 작성했다’는 보도를 지면에 내보냈다. ‘상고법원 도입을 고리로 한 재판 청탁 가능성’을 처음 보도한 것인데, ‘기사 거래’ 의혹을 담은 문건 공개가 논조 변화에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여현호 선임기자, 김남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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