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 집 인근 놀이터에서 재임 시절 일어난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파문과 관련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조사결과와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문건에서 드러난 ‘판결을 거래나 흥정의 수단으로 삼은 흔적’들이 ‘재판 개입’ 의혹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문건에 적힌 내용 다수와 결과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조단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 관련자 일부만 조사하고 “재판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했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근거 제시 없이 “재판에 부당하게 간섭·관여한 바가 결단코 없다”고 선언해 사법부 신뢰만 떨어뜨리고 있다.
■ `청와대와 윈윈'→전교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인정 파기
원 전 원장의 2012년 대선 개입을 처음 인정한 2심 판결 다음 날인 2015년 2월10일 행정처는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하고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줄 것”이라는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의 희망이 담긴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문서를 작성했다. 같은 해 3월26일 작성된 ‘상고법원 관련 BH(청와대) 대응전략’에도 이병기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원 전 원장 사건을 ‘전원합의체 판단 등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있다. 실제 원 전 원장 사건은 2015년 5월8일 전에 전원합의체에 회부됐고, 7월16일 대법관 만장일치로 일부 증거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아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그러나 특조단은 “소부와 전원합의체에서 있었던 구체적인 합의 과정은 조사대상이 될 수 없다”며 선을 그었다. 또 “사건의 난이도 등을 고려해 전원합의체 회부를 합의했다”는 주심 민일영 대법관에게 그 이상은 “일일이 물을 수 없었다”고 특조단은 밝혔다.
대법원의 판단 결과에 따라 청와대와의 이해득실을 표로 꼼꼼히 따진 2014년 12월3일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 문건도 현실과 일치했다. 문건은 “(고용노동부의) 재항고 인용 결정→양측(대법원과 청와대)에 윈윈의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검토했다. 전교조는 2013년 10월 고용부의 ‘노조 아님’ 통보를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선고 때까지 합법 노조의 지위를 유지해달라”는 집행정지도 신청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문건 작성으로부터 5개월 뒤인 2015년 5월 1심에 이어 집행정지를 결정한 2심을 파기하면서 고용부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특조단 보고서에서는 이와 관련해 당시 대법 주심이었던 고영한 대법관을 조사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2015년 7월27일 작성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에는 ‘발레오만도 노동조합 조직형태 변경 사건’도 대법원이 심리 중인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대통령의 국정운영 뒷받침’ 사례로 소개됐다. 문건은 이 사건의 결론에 따라 “향후 노동조합 운영방식 전반에 큰 파급력이 예상”된다고 적혀있는데, 실제 2016년 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기업 교섭력을 높이려 만든 ‘산업별 노조’ 소속 지부·지회를 과거의 ‘기업별 노조’로 쉽게 전환하는 길을 열어줬다. 대법관 중에는 “사용자의 지배·개입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반대의견도 있었다. 문건과 선고 사이인 2015년 8월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오찬을 가졌다.
■ ‘휴일근로 중복할증 선고 보류’→7년간 선고 안 해
‘청와대의 의중’을 고려해 선고 시점을 저울질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자아내는 부분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전략’ 문건에는 이병기 비서실장의 최대 관심사로 “한일 우호 관계의 복원”을 제시하며,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 사건의 외교적 해결 노력 중→출국정지 기간 연장처분 집행정지신청 사건의 항고심에 대하여 4.15까지 결정 보류 요청”,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사건에 대하여 청구기각 취지의 파기환송판결 기대할 것으로 예상”이라고 적었다.
이 문서가 작성된 2015년 3월26일에는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 의혹 기사로 기소된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 신문> 지국장이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출국정지 연장을 중단해달라”며 낸 소송의 항고심이 진행 중이었다. 1심은 2015년 2월6일 가토 전 지국장의 집행정지 신청 뒤 7일 만인 2월13일 “출국할 경우 형사 재판에 출석할지 알 수 없다”며 기각을 결정했다. 그러나 항고심 결정이 나오지 않는 사이 법무부가 2015년 4월14일 출국을 허용하면서, 가토 전 지국장은 소송을 취하했다. ‘4월15일까지 결정 보류’와 시기적으로 맞물린다.
일제 징용 피해자가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대법원은 뚜렷한 이유 없이 5년째 선고를 미루고 있다. 징용 피해자 5명은 2000년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어 2005년 또 다른 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주금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양쪽 사건 모두 1·2심은 패소했지만 대법원은 2012년 5월 최초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파기환송 취지대로 파기환송 뒤 항소심이 선고됐고, 2013년 두 사건은 다시 대법원에 접수됐지만 이미 판단한 사건인데도 “관련 사건을 통일적이고 모순 없이 처리하기 위해 심층 검토 중”이라는 이유로 판결은 지금까지 미뤄지고 있다.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문건에는 휴일근로수당 중복할증 사건에 대해 “기업의 막대한 추가 부담을 고려해 선고를 잠정 보류하고 있다”고 적혀있다. 이 사건은 휴일근로 시간도 연장근로 시간에 포함되기 때문에 통상임금의 2배로 계산한 휴일근로수당을 달라며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소송을 의미한다. 당시 휴일근로수당은 통상임금의 1.5배만 지급됐기 때문에 법원이 중복할증을 인정하면 지난 3년간 못 받은 0.5배의 임금과 이자를 회사에 청구할 수 있다. 중복할증이 인정되면 수당뿐 아니라 노동시간도 당시 주 68시간에서 주 52시간으로 줄어들 수 있게 됐다. 이 사건은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뒤 대법원에 접수돼 2015년 9월 전원합의체에 회부됐고, 문건에도 나오듯 “중복할증이 하급심 판결의 대체적인 입장”임에도 퇴임 때까지 결론이 ‘보류’됐다.
■ 행정처 심의관 전화 받고 선고 연기
양승태 대법원장 때 행정처의 행정과 법원의 재판이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은 정황들도 의심을 짙게 한다. 행정처 심의관이 2015년 2월9일 상고심의 쟁점과 사건의 심각성을 담아 작성한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항소심 선고보고’ 문건은 이 사건을 맡은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전달됐다. 이 대목은 특조단도 “연구관의 검토보고서 작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2015년 9월15일 작성된 ‘통진당 비례대표 지방의원 행정소송 예상 및 파장 분석’ 문건도 해당 사건 “재판장의 잠정적 심증 확인”이라고 적혀있다. 이 사건 재판장은 특조단 조사에서 “연수원 동기인 심의관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국정감사와 관련해 선고를 연기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응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먼저 얘기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행정처가 양승태 대법원장이 추진하는 상고법원 입법의 마지막 기회로 여겼던 2015년 하반기 국정감사를 앞두고 연기를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문서 작성 다음 날(9월16일)로 예정된 판결 선고일을 11월25일로 연기했다.
행정처가 재판부의 권한을 침해했다고 볼만한 문건도 있다. 2015년 1월 작성된 ‘통진당 행정소송 검토보고’는 헌재에서 정당 해산 결정과 함께 의원직을 박탈한 통진당 국회의원들의 행정소송의 결과를 행정처에서 미리 검토했다. 문건은 ①각하→부적절 ②기각 ③인용 ④ 일부 인용(지역구), 일부 기각(비례대표)으로 나눠 쟁점과 각각의 근거를 자세히 적었다.
2016년 6월8일 작성돼 임종헌 당시 행정처 차장에게 보고된 ‘통진당 사건 전합 회부에 관한 의견’ 문건은 통진당 국회의원들의 행정소송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할 경우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검토했다. “전원합의체 판결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게 문서의 결론이었다. 이 사건은 전원합의체에 회부되지 않은 채 3년째 대법에서 심리 중이다. 특조단은 “행정처의 행정작용과 대법원의 재판작용은 엄격하게 분리되어야만 재판작용이 독립적으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행정처의 관여는 전원합의체 회부 권한을 가지는 담당 소부 소속 대법관의 재판에 관한 권한을 침해하거나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한 판사는 “특조단 보고서는 재판 개입이 없었다고 판단하지만 의혹이 제기된 모든 재판 관련자들을 조사하지 않았다. 재판 개입이 있거나 없었다고 결론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어느 경우라도 양승태 대법원장도 강조했던 재판의 공정한 외관이 심하게 훼손돼 국민들의 신뢰를 받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국민 신뢰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취임사와 퇴임사에서 특히 강조한 부분이었다. “사법의 1차적 기능은 평화로운 절차에 의하여 당면한 분쟁을 해소하고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기능은 법원과 재판절차에 대한 국민 신뢰의 바탕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 확보는 사법부의 변함없는 염원입니다.(취임사)” “오랜 법관 생활에서 국민의 신뢰야말로 사법부의 유일한 존립기반임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는 국민의 신뢰 증진이 저에게 주어진 법관으로서의 마지막 소명이라는 각오 아래 그 방향으로 모든 사법정책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퇴임사)” 그러나 “법관에 대한 존경 없이 사법부의 미래도 없다”던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대법원의 재판은 정말 순수하고 신성하다. 함부로 폄하하는 것은 견딜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구체적인 ‘재판 개입’ 정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답하지 않았다.
법원조직법을 보면 대법원장은 전원합의체의 재판장이자 사법행정 사무를 총괄한다. 양 전 대법원장이 당시 행정처에 문건의 작성을 지시하거나 보고받았다면, 그 재판에 문건의 내용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임종헌 전 차장 등의 지시로 심의관들이 작성해 보고한 문건들의 ‘윗선’ 규명이 필요한 이유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