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 주최 제14회 서울청소년대회 ‘5·18 골든벨’의 문제.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5·18 민주화운동 38주년이었던 18일 오전,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는 중·고등학생 518명이 스마트폰과 태블릿 피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열공’ 중이었습니다. 이들은 5·18 기념 제14회 서울청소년대회 ‘5·18 골든벨’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과 수도권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이었습니다. ‘5·18 골든벨’은 2015년부터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행사인데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1980년 5월18일부터 1997년 5월 5·18 민주화운동이 법정기념일로 제정될 때까지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OX 퀴즈’를 푸는 대회입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경희여고 2학년 이서현(17) 양은 “2년 전 중학생 때 역사 선생님이 ‘5·18 골든벨’ 참여를 권유해 참가했었는데, 그때 우리 현대사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게 좋아서 올해는 친구들과 같이 왔다”며 “2년 전보다 역사공부를 많이 했지만 골든벨을 울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며 웃었습니다.
경기도 평택에서 온 중학교 3학년 오영재·이상기(15) 군도 “작년에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5·18을 알게 됐는데, 영화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김사복 씨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실제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왔다”며 “교과서에는 5·18에 대해 자세히 나오지 않아 구글과 유튜브에서 자료를 찾아보며 퀴즈 공부를 했다”고 답했습니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5·18 골든벨’ 퀴즈의 수준은 어떨까요? 저는 고등학교 때 나름 한국 근·현대사를 배우고 수능을 봤던 세대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출제돼 ‘멘붕’에 빠졌습니다. 학생들이 풀었던 문제를 같이 보실까요?
1. “(강풀 작가의 웹툰 ‘26년’과 관련해) 웹툰 내용에서 광주 시민의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억압한 세력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주도한 김갑세 회장은 1980년 5월 광주 항쟁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도청을 사수하다가 부상을 당한 인물이다.”
2.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최초로 알린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대표 저자로 소개된 소설가 황석영은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아서 독일과 미국에서 망명생활도 하였으며, 최근 ‘수인’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OX 퀴즈’의 정답이 뭔지 감이 오시나요? (이 두 문제의 답은 기사 마지막에 써두겠습니다.) ‘5·18 골든벨’을 울리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온 학생들은 알쏭달쏭한 퀴즈의 정답이 발표될 때마다 환호와 탄식을 터뜨렸습니다. 웹툰 ‘26년’과 관련된 예선 두 번째 문제에서 탈락한 고등학교 1학년 임민재(16) 군은 “정답을 전혀 알 수 없었던 문제였다”며 “퀴즈대회 중반 ‘골든벨 부활전’ 통과를 노려보겠다”는 각오를 밝혔습니다.
18일 오전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서울과 경기도 중·고등학생 518명이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가 주최한 5·18 기념 제14회 서울청소년대회 ‘5·18 골든벨’에 참여하고 있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올해로 14회째를 맞은 5·18 서울청소년대회 행사가 처음부터 ‘골든벨 대회’ 형식으로 치러졌던 건 아니었습니다. 2005년부터 2014년까지는 ‘5·18 기념 서울학생 백일장 및 사생대회’가 열렸습니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천재 고교생이 쓴 5·18 시’로 다시 읽히며 화제를 모으는 정민경(당시 경기여고3) 씨의 시 ‘그날’도 2007년 제3회 5·18 기념 서울학생 백일장 대상작이었습니다. (
▶관련 기사 : 오월의 시 ‘그날’ 쓴 고등학생 11년 만에 입 열다) 그러나 이 행사는 2015년 이후 올해까지 중단된 상태입니다. 대신 현장대회 형식의 ‘5·18 골든벨’ 행사가 시작됐죠. ‘5·18 청소년 백일장’은 왜 사라지게 됐을까요.
여기에는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가 최근 몇 년 동안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 수밖에 없었던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일장과 사생대회 응모작을 심사하기 위해 작품을 놓아야 할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는 2005년부터 2014년 말까지 당시 서울 배재정동빌딩에 있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실의 한 공간을 무상으로 빌려 사용했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행정안전부 산하 공공기관이지만, 시민단체 성격의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 또한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공간을 내어 주는 배려를 했던 거죠.
그러나 2014년 말,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는 더 이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사무실을 함께 쓸 수 없게 됩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임차료 부담을 덜기 위해 2015년 1월 기존보다 30% 작은 규모의 사무실을 얻어 경복궁 앞 트윈트리타워 건물로 이전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는 원치 않았던 이별을 하게 됩니다.
왜 두 기념사업회가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한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명박 정부 이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예산은 지속적으로 줄었어요. 전체 예산이 감소한 만큼 임차료 부담이 커졌죠. 비용을 줄이려면 임차료가 싼 사무실을 찾아 이사를 가야 했고요. 직원들은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와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당시 내부 상황이 어렵고 복잡했습니다. 저희도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가 새 사무실에 같이 못 간다는 걸 기사를 통해 알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이 관계자가 말한 당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내부상황’은 무엇이었던 걸까요? 앞서 설명해 드렸듯이 공공기관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은 행정안전부 장관이 임명합니다. 그런데 2014년 2월 당시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은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박상증 목사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
▶관련 기사 : 민주화기념사업회에 ‘친박 낙하산’)
문제는 박상증 목사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규정과 달리 내부 추천을 받지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불거졌습니다. 이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직원들은 박 이사장의 임명이 ‘친박 낙하산’이라며 7개월 동안 농성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회는 뉴라이트 성향의 인사들이 포진했는데요. 이 결과 기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역할은 축소됐고, 구성원들은 위축된 상황에 처했습니다. 잔뜩 움츠러든 분위기 속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직원들은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의 분리를 적극적으로 막을 수 없었던 겁니다. (
▶관련 기사 : 5개월째 월급 끊긴 민주화사업회 ‘낙하산’ 갈등 풀릴까)
그는 “당시 새로 이전하는 사무실의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이사회의 공식적인 결정은 없었던 걸로 안다”며 “임원진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됐던 걸로 들었다”고 덧붙였습니다.
18일 오전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 주최 제14회 서울청소년대회 ‘5·18 골든벨’에 참가한 한 학생이 답을 고민하고 있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실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예산은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예산안이 반영됐던 2008년 69억원에서 2009년 62억원으로 줄었고, 박근혜 정부 들어선 2015년 59억원, 2016년 53억원으로 줄곧 하향곡선을 그렸습니다. 인력도 축소됐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50명이었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정원은 MB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에 따른 인력 구조조정 때문에 42명으로 줄어든 뒤 현재까지 그 숫자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쪽은 “이명박 정부 때는 그래도 42명 정원을 채웠지만, 박근혜 정부 때 예산이 크게 줄면서 결원이 발생해도 충원하지 못해 지난해에는 인원이 35명까지 떨어졌다”며 “올해 박근혜 정부 이후 처음으로 인력을 신규 채용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일로 하루아침에 보금자리를 잃은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는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서대문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하게 됩니다.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는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들로 구성된 단체이지만, 공법단체는 아니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경자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 이사는 “백일장과 사생대회 출품작을 심사하려면 작품을 보관할 넓은 공간이 필요한데, 새로 옮긴 사무실이 워낙 좁아 진행이 어려웠다”며 “이 때문에 2015년부터 5·18 서울 청소년대회를 현장대회 형식의 ‘골든벨’로 바꿔 열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는 다행히 올해 서울시의 도움으로 안국동에 새 사무실을 마련했습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지난달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했습니다. 경기도로 터전을 옮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현재 서울에서 회의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의 사무실을 빌려 쓰는 등 과거와 정반대의 입장이 됐습니다.
하지만 정경자 이사는 공간 문제로 5·18 서울학생 백일장 및 사생대회가 중단된 점을 안타까워했습니다. ‘5·18 골든벨’의 경우 학생들이 활기찬 현장 분위기 속에서 5·18에 대해 공부를 할 수 있고, 홍보 효과가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학생들이 대회에 참여하려면 학교 수업에 빠져야 하는데다 문예공모전 형식의 대회와 견주어 ‘5·18 골든벨’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과 감정을 엿볼 수 있는 글과 그림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11년 전 5·18 서울학생 백일장에서 시 ‘그날’로 대상을 받은 카피라이터 정민경(29) 씨 역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5·18을 앞두고 제 시가 읽힌다는 것은 그만큼 ‘오월 광주’와 관련된 문화 콘텐츠가 드물기 때문인 것 같아 안타깝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내년에는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가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백일장을 개최해 정민경 씨의 시 ‘그날’을 뛰어넘는 10대의 ‘5·18 시’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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