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조사를 마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3월15일 오전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나서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뇌물·횡령·조세포탈 등 16가지 혐의로 기소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관련 증거와 수사기록 일체에 ‘동의한다’는 의견서를 법원에 냈다.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혐의를 모두 부인하고 있는데, 정작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증거는 일단 인정하고 재판에 임하겠다는 것이다.
이 전 대통령 쪽 변호인은 지난 8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 ‘증거인부서’(검사가 제출한 증거를 피고인 쪽에서 인정하거나 부인하는 의견서)를 냈다. 검찰이 이 전 대통령의 16가지 혐의를 입증하겠다며 법원에 낸 증거 모두에 동의한다는 취지의 의견서다. 법원은 재판에 제출된 증거가 믿을 만한지 증거조사를 통해 그 증거 능력 여부를 따진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를 피고인 쪽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입증책임은 검찰이 져야하는데, 이 전 대통령 쪽은 이를 모두 인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전 대통령 변호인단은 9일 “모든 증거에는 동의하고, 입증 취지는 부인하는 내용의 증거인부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통상적으로 (증거를) 부인하는 의견서와는 다르다”며 스스로 이례적 결정임을 밝혔다. 변호인단은 이런 결정이 이 전 대통령 판단이라고 했다. 변호인들은 일반적인 의견서처럼 대부분의 증거를 ‘부동의’하자고 제안했지만 이 전 대통령이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대부분의 증인들이 같이 일을 해왔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검찰에서 그와 같은 진술을 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인데 법정에 불러와 거짓말을 한 것 아니냐고 추궁하는 것은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런 모습을 국민들께 보여드리는 것도 옳지 않은 것같다. 변호인단에서 객관적 물증과 법리로 싸워달라”고 말했다고 변호인단은 전했다. 다만 변호인단은 “그렇다고 죄를 인정한다는 취지가 아니다. 금융자료 추적이나 청와대 출입기록 등 객관적 자료를 통해 (공소사실을) 반박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 대통령의 혐의는 크게 △다스 비자금 등 349억원(횡령) △삼성이 대납한 다스의 미국 소송비 67억여원(뇌물)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및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등으로부터 받은 43억여원(뇌물) △다스 법인세 31억원 포탈 등이다.
법조계에서는 검찰 수사를 “정치보복을 위한 표적수사”라고 주장했던 이 전 대통령 쪽의 ‘극단적인’ 재판 전략 변경 배경을 두고 여러 해석을 내놓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이 전 대통령이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를 입증하기 위한 증인들이 무더기로 법정에 나와야 한다. 생생한 증언이 나올 수록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수 있다”고 했다. 수사기록 전체를 검토한 이 전 대통령 쪽에서 ‘승률 계산’을 해보고 전략을 수정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재판 기간만 길어지고 여론은 더 나빠지는 상황은 피하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이 전 대통령 재판 진행 방식 등을 정하는 2차 공판준비기일은 10일 오후 2시10분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에서 열린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