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주관하는 '낙태죄 폐지 결의 범시민사회단체 공동기자회견'이 지난해 11월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렸다.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참석해 손피켓을 든 채로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국회 입법조사처가 형법상 낙태죄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회 보고서를 펴낸 것으로 나타났다. 낙태죄 규제의 완화 필요성을 명시적으로 밝힌 국회 보고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 1일 ’
낙태죄에 대한 외국 입법례와 시사점’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임신·출산을 직접 체험하고 생명과 스스로의 처지 사이에서 고민할 여성의 입장에서 낙태 문제를 바라본다면 헌법적 담론의 차원에서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여 낙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설득력이 있다”는 의견을 냈다. 보고서는 또 “강력한 낙태 규제가 위험한 방법으로 낙태를 하도록 내모는 형국”이라고 지적하며 “현행법상 낙태는 거의 전면적으로 금지되기에 상담제도 등의 마련은 물론 낙태 관련 규정의 정비도 부족할 뿐 아니라 비의료기관 혹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의료적 환경에서 음성화된 시술이 만연됨으로써 임부의 건강·생명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밝혔다.
’낙태죄 폐지’는 한국 사회, 특히 여성계에서 꾸준히 제기돼 온 담론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지난해 9월 청와대 누리집 ’국민청원’ 코너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요청은 한 달 만에 청원 수 2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이들은 현행 형법상 ’임부의 요구에 의한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낙태 처벌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국 청와대 정무수석은 지난해 11월 이 국민청원에 대한 답변으로 청와대 페이스북에 올린 동영상을 통해 “현행 법제는 (낙태죄에 대한)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 있다”며 “여성의 자기결정권 외에 불법 임신중절 수술 과정에서 여성의 생명권, 여성의 건강권 침해 가능성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말해 낙태죄 폐지에 힘을 실은 바 있다.
현행 형법 제27장 제269조에는 ‘부녀가 약물 및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돼 있다. 한국처럼 임신중단(낙태)을 임신 주수와 관계없이 전면 금지(여성이나 배우자에게 유전학적 질환이 있는 경우 등을 제외)하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몇 안 된다.
그러나 이 법은 현실적으로 사문화된 지 오래다. 낙태죄로 처벌받는 경우는 극소수이고 낙태 건수는 여전히 많다. 보건복지부가 2011년 실시한 ’전국 인공임신중절 변동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임신중단 건수는 2010년에만 10만8679건이다. 보건복지부 2015년 조사에서도 가임기 여성 5명 가운데 1명이 임신중단을 경험한 것으로 나온다. 이 가운데 95%는 불법이다.
임신중단이 불법화되면서 따라오는 부작용은 크다.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수술비가 비쌀 뿐 아니라, 잘못된 의료 행위로 피해를 보더라도 이에 대한 권리를 제대로 요구하기 힘들다. 여성 혼자 수술비를 감당하는 경우 비용 마련 등으로 시간을 지체하느라 적절한 수술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국회 입법조사처 보고서가 밝힌 외국 사례를 보면, 프랑스의 경우 임신 12주의 기간 안에는 곤궁한 상황에 부닥쳐있는 임부가 의사에게 임신중단을 요청할 수 있다. 독일은 22주 미만의 시기에 임부가 의사와 상의해 임신중단을 할 수 있고, 영국은 임신 24주 이내에서 임부나 임부의 가족의 육체적·정신적 건강에 대한 훼손 위험이 있을 경우 임신중단이 가능하다. 보고서는 향후 개선방향으로 “임신 12주의 범위 내에서는 임부의 의사에 따라 낙태를 허용하는 것을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며 “의학적으로 안전한 낙태 시술이 이뤄지고 낙태 전 상담제도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시민사회에서는 국회 입법조사처 제안처럼 주수를 제한하는 식의 ’낙태죄 규제 완화’가 아니라 ’낙태죄의 완전한 폐지’가 필요하다는 견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당,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등 20여개 정당 및 시민단체가 모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공동행동)은 그동안 형법상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활발하게 벌여왔다. 나영 지구지역네트워크 집행위원장(공동행동 정책교육팀장)은 “국회 보고서가 제시하고 있는 12주는 너무 짧다. 주수 제한은 여전히 또 다른 제약과 처벌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라며 “낙태죄 폐지의 문제는 단지 태아 생명권에 대한 보루로서 검토될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성적 자기결정권과 재생산 권리,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 있는 제반의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검토될 때 실질적인 낙태율의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오는 24일 낙태죄가 헌법에 위반되는지 여부를 가리는 헌법재판소 공개변론이 열릴 예정이어서 낙태죄 폐지 관련 여론이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2012년 헌재는 8명의 헌법재판관이 합헌 의견과 위헌 의견 사이에서 팽팽하게 대립한 끝에 합헌 의견 4 대 위헌 의견 4로 낙태죄 ’합헌’ 결정을 내렸다. 위헌 의견이 의결 정족수인 6명에 달하지 못했다. 합헌 결정을 내린 재판관들이 모두 퇴임한 지금, 헌재는 어떤 결론을 낼까?
사회·경제적 이유로 임신중단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준비 중인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헌재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정이 나길 기대하고 있다. 결정이 긍정적으로 나온다면, 더이상 여성들만 처벌 대상으로 삼는 구시대적 형법 낙태죄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송채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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