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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언제나 초보 집사로 남고 싶다

등록 2018-04-20 20:34수정 2018-04-20 20:42

봄날을 맞아 입이 찢어져라 하품 중인 라미.
봄날을 맞아 입이 찢어져라 하품 중인 라미.
[토요판]박현철의 아직 안 키우냥

17. 집사의 탄생

캣폴에 달린 해먹 ‘덕후’ 보들이가 마룻바닥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출근길에 라미 주먹만하게 창문을 열어놓아야 할 만큼 공기가 따뜻해졌다. 한때 보들이가 홀릭했던 3인용 전기방석도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봄이 왔다.

봄은 라미의 털로부터 왔다. 겨울엔 좀처럼 털을 내뿜지 않던 라미의 털이 빠지기 시작했다. 따뜻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털 뿜뿜이 보들이는 계절에 상관없이, 자기의 털로 집 안을 덮어버리겠다는 기세로, 털을 뿜어냈다. 지난여름엔 ‘더워지니까 그런가 보다’, 겨울엔 ‘추워지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그냥 보들인 덥든 춥든, 더워지든 추워지든 털을 뿜어내는 것이었다.

털 뿜뿜이들과 1년 넘게 살아보니 ‘털 문제’는 근본적인 해결책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겠다. (사람) 아이와 고양이를 함께 기르는 선배 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주 빗질하고 자주 청소기 돌리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여러 고양이빗을 써봤는데, 빗질을 한 뒤 빗에 붙은 털을 얼마나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요건 중 하나였다. 털 제거하기가 불편하거나 귀찮으면 아예 빗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 장만한 2000원짜리 고무 고양이빗이 2만원어치 이상의 역할을 하는 중이다. 보들이 기준, 이틀에 한번은 빗질을 해주려 노력 중이다.

햇살이 좀 더 따뜻해지면 두 냥이들을 데리고 소풍도 가볼 참이다. 지난해 봄엔 중성화 수술을 하느라 봄나들이는 꿈도 못 꿨다. 고양이와의 나들이는 달아나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사고 염려 탓에 추천하지 않는 이들이 많지만, 가슴줄 단단히 채워서 한강이라도 나가보고 싶다.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고 싶다. 같이 사는 고양이라고. 예쁘지 않으냐고.

지난해 9월 이후로 하지 못했던(않았던) 목욕도 해야 한다. 이번엔 한번에 한놈씩, 비눗물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마루로 뛰어들지 않게.

라미, 보들이와 함께 산 지 1년 하고도 8개월이 지났다. 그 삶을 기록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됐다. 그동안 라미와 보들이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중성화 (대)수술을 했고, 대한민국 서울의 폭염을 견뎠고, 폭신한 눈이라는 것도 밟아봤다. 이 기록들이 묶여 책으로 나오는 바람에 ‘매스컴’도 탔다. 둘은 그 경험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좋아할지, 싫어할지, 아무 감흥이 없을지, 알 길은 없다.

1년8개월 동거의 경험을 고양이들만 겪은 건 아니다. 스무살 이후 혼자만 살아온 집사는 19년 만에 ‘움직이는 생명’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생명이 주는 기쁨은 컸지만 포기한 것들도 많다. 무엇보다 집사는 이제 그 포기한 삶에 익숙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 겨우 1년 하고도 8개월‘밖’에 함께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장 오늘 저녁에 호기심쟁이 라미가 어떤 사고를 칠지 알 수 없다. 어젯밤 갑자기 내외했던 보들이가 오늘은 또 갑자기 ‘앵겨올’지도 모른다. 집사의 배움은 끝이 없을 것이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건 ‘평생 1살짜리 아이를 기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오늘이 어제와 다르고, 내일이 오늘과 다를 두 고양이와 사는 건 행복하거나 불행하기 이전에 설레는 일이다. 그래서 난 언제나 초보 집사다.

박현철 서대문 박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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