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등 성범죄 사건 재판에서는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 등 피해자의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 피해자의 입장을 기준으로 심리·판단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성추행·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활발한 가운데 성희롱 사건 재판의 심리와 증거판단의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한 판결이다. 성희롱·성추행에 대한 사회 일각의 왜곡된 인식과 주장을 바로잡는 계기로도 기대된다.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12일 지방 ㅇ 이공대 교수였던 ㅈ씨가 학생들에게 14건의 성희롱을 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뒤 이를 취소해달라며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 상고심에서 ㅈ씨의 해임을 취소하라는 원심판결을 깨고 원고패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3일 밝혔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성희롱·성추행 사건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해자 중심의 왜곡된 인식’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대법원은 앞선 항소심 재판부가 “일반적·평균적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라고 보기 어렵다”며 ㅈ씨의 성희롱을 인정하지 않은 데 대해, “어떤 행위가 성희롱인지는 사회 전체의 일반적·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라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원심이 잘못 판단했다”고 밝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ㅈ씨가 평소 학생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고, 피해자가 익명 강의평가에서 ㅈ씨의 ‘백허그’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성희롱 행위 이후에도 ㅈ씨 수업을 계속 수강한 점 등을 근거로 ㅈ씨 행위가 성희롱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그런 판단 이유는 자칫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와 인식이라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어 적절치 않다”며 “교수와 학생 관계인 데다, 학교 수업이 이뤄지는 실습실이나 교수 연구실 등에서 그런 행위가 발생했고, 취업 등에 중요한 교수 추천서 작성 등을 빌미로 성적 언동이 이루어졌다는 점,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됐다는 정황 등을 충분히 고려해 피해자의 입장을 기준으로 심리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종전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거나 뒤늦게 신고했다는 등의 이유로 피해자의 진술을 믿지 않는 태도도 잘못이라고 대법원은 지적했다.
대법원은 또 다른 피해자의 진술이 항소심에서 증거로 인정되지 않은 데 대해, “성희롱 피해자는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피해 뒤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피해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신고하는 경우가 있으며, 신고 이후에도 피해사실 진술에 소극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며 “성희롱 피해자의 이런 특별한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는 또 다른 피해자가 뒤늦게 성희롱 사실을 신고하고 신고 이후에도 피해사실의 진술을 거부하는 등 “성희롱 내지 성추행 피해자의 대응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이 피해자의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을 심리할 때는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며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 문화와 인식, 구조 때문에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및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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