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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몰랐다”·두루뭉술…미투 가해자들 ‘분노유발 사과법’

등록 2018-02-28 15:34수정 2018-02-28 17:59

연극배우 최일화·이명행씨 등
“잘못인지 몰랐던 과거 반성”
이윤택 감독, 조민기 배우 등은
“불미스런 사건” 가해사실 격하
배우 조재현, 인간문화재 하용부
“책임지겠다” 구체성 떨어져

“가해 사실 구체적 인정하고
피해자에 직접 의사표시 필요”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봇물 터진 ‘#미투’에 힘입어 피해자들의 성폭력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피해자의 ‘인생을 건’ 고백에 대한 가해자 반응은 대체로 ‘1도·2부’(1단계 도망가라, 2단계 잡히면 부인하라)라는 범죄 피의자의 정형화된 대응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부인으로 버티다 폭로가 잇따르면 마지못해 두루뭉술하게 인정하거나, 아예 침묵을 택하기도 한다. 이런 ‘편의적’ 사과가 피해자의 고통을 더 키운다는 지적이 나온다.

죄의식이 없었다 일부 가해자들은 사과문에서 성폭력 행위를 ‘과거’ 자신의 무지 탓으로 돌리고 있다. 성폭력 가해 사실이 폭로되기도 전에 자진해서 성추행 사실을 사과한 배우 최일화씨는 “당시엔 그것이 잘못인지도 몰랐던 저의 무지와 인식을 (후회한다)”고 탓했다. 2010년 작업실에서 제자를 성추행한 사실이 폭로된 사진작가 배병우씨는 “이전에는 깨닫지 못하였던 저의 잘못된 행동”이라고 밝혔다. 여성 스태프를 성추행한 연극배우 이명행씨도 마찬가지다. 이씨는 “저의 잘못된 행동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후회스럽다”고 사과했다. 명백한 성폭력을 ‘당시엔 잘못인줄 몰랐다’는 해명으로 덮고 넘어가려 한 것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몰랐다는 해명 자체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사회였는지 역설적으로 드러낸다”며 “특정인의 잘못된 문화가 아니라 여성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보편적인 문화임이 드러난 셈”이라고 말했다.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그때고 지금이고 분명한 범죄 행위를 몰랐다고 해명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라며 “설사 정말로 몰랐다고 하더라도 범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연극계 거장’으로 불리는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지난 19일 오전 서울 창경궁로 30스튜디오에서 자신의 성추행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연극계 거장’으로 불리는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지난 19일 오전 서울 창경궁로 30스튜디오에서 자신의 성추행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구체적 사과도 없었다 연극 연출가 이윤택씨와 배우 조민기·조재현씨 등은 사과문에 사과해야 할 구체적 행위를 명시하지 않았다. 두루뭉술하게 ‘불미스러운 사건’ ‘죄스러운 일’ 등 추상적 표현을 썼다. 또 인간문화재 하용부씨는 “성추문은 제가 잘못 살아온 결과물”이라며 성폭력을 ‘성추문’으로 표현했다. 피해자의 증언을 구체성이 떨어지는 소문 또는 단계가 낮은 ‘구설’ 수준으로 격하시킨 셈이다.

한샘 성폭력 피해자를 변호하고 있는 김상균 변호사는 “폭로된 행위의 공소시효가 지난 경우가 많고 증거도 불충분하니까 가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면서 사과를 한 뒤, 수사기관 등에서 혐의 사실을 다퉈 형사처벌을 피하려는 의도가 읽힌다”며 “법률적 검토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짚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방법이 없다 배우 조재현·조민기씨, 인간문화재 하용부씨 등은 성폭력 폭로 뒤 “모든 걸 내려 놓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직위를 어떻게 내려놓겠다는 건지 명확한 설명은 없었다.

정경주 민우회 활동가는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말은 자신이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로, 가해자의 위치를 확인시켜준다는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권력자인 가해자가 스스로 ‘대의에 따른 결정을 내리는 희생자’라는 이미지를 획득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도 “피해자들이 직업, 생계 등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피해사실을 폭로하는데 가해자들이 표면적 직위에서만 빨리 면피하려 하는 것은 실질적인 책임을 벗어나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침묵을 택했다 사건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처럼 묵묵부답인 경우도 있다. 극단 ‘목화’의 대표인 연출가 오태석씨는 지난 15일 이래 성추행 폭로가 이어지고 있지만 2주째 아무런 입장 표명 없이 잠적 중이다. 고은 시인도 최영미 시인의 성추행 피해 폭로 뒤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 오늘날에 비추어 성희롱으로 규정된다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뉘우친다”고 사과문을 냈을 뿐, 이어진 추가 폭로 등엔 입을 다물고 있다. 이나영 교수는 “현재 가해자들의 사과는 유형이 어떻든 직접 사과를 회피하고 법적인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공통점을 지닌다”며 “가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직접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태도를 보여야 사과 자체의 의미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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