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당시 윤상삼 기자(왼쪽)와 영화 <1987> 속 윤 기자(배우 이희준·오른쪽). 출처 : 동아일보, 영화 스틸컷
500만명 누적 관객을 앞두고 있는 영화 <1987>엔 두 종류의 호명이 오간다. 가해자는 대개 이름 석 자 그대로의 실명이고, 가해자와 맞선 이들은 거개 성 하나에 직업을 강조해뒀다. 장준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해달라는 의미로 실명을 쓴 부분도 있고, 그 당시 피땀 흘리셨던 분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의미로 실명을 쓴 부분도 있다.” (<씨네21> 인터뷰)
박종철 열사를 부검한 황 박사(당시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부검을 지시한 최 검사(최환 서울중앙지검 공안부장), 이를 모두 취재한 윤 기자(윤상삼 동아일보 기자)가 후자 쪽이다. 장 감독이
“(저마다의) 직업적 사명과 인간의 도리를 다한 이들”이라 구분한 무리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부재하는 이가 윤 기자다. 1999년 43살 나이에 간암으로 눈을 감고, 이후 동아일보사와 업무상 재해 다툼(이후 승소)을 벌여야 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결실로 이듬해 창간된 <한겨레>가 영화 <1987> 개봉 전후 단 한 번도 소회를 들어볼 수 없었던 윤 기자와 가상 인터뷰했다. 질문만 추임새처럼 넣었을 뿐, 답변은 추가나 왜곡없이 윤 기자가 남긴 말로 모두 채웠다.
근거는 <한국기자상 30년>에 담긴 윤 기자의 글이다. 그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이란 제목으로 팀 동료 4명과 함께 1987년도 한국기자상(19회·한국기자협회)을 수상하고, 소감 및 취재기(<한국기자상 30년> 수록)를 대표 작성했다. 핵심 구실을 했다는 뜻이다. ‘박종철 사망’ 소식을 처음 알린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도 동료 둘과 함께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2016년 TV조선·JTBC·한겨레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보도로 한국기자상을 함께 받은 것과 유사하다. 기자협회가 사실상 동일 사안으로 한국기자상을 한 해 공동 수여한 경우는 통틀어 이 둘 밖에 없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조작 혐의로 구속되는 박처원 치안감(위). 이어 구속수감 또는 불구속기소 뒤 유죄 확정 때의 모습(아래 좌우). 출처 : <한국기자상 30년>
Q. 30여년 만에 박종철 열사 사건이 다시 전 국민 관심사가 되었다.
“당시 경찰은 신군부 독재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운동권 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박군 사망 사건 이전에도 부천경찰서 소속 문귀동 경장의 권인숙 씨에 대한 성고문 사건에서도 극명하게 표출됐는데 검찰마저 사건의 진상 규명에 뜻이 없어 분노를 샀다. ‘박군 물고문 살인사건’은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보아 어쩌면 예견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Q. 취재를 하게 된 경위는 영화와 같은가.
“박군이 숨진 다음날인 1월15일자 <중앙일보> 2판(1판 신문은 정오께 인쇄됨)의 사회면 2단 기사로부터 시작됐다. <동아일보>는 이후 사실 확인을 나서 3판(오후 6시 마감)부터 사회면 중간 톱기사로 게재했다. 문제는 박군 사망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다음부터였다. 방송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대부분의) 신문들도 숨을 죽였다.”
Q. 보도지침도 있던 시절이다.
“경찰 발표(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 영화에선 박처원 치안감의 설명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는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설명)가 있던 다음날인 16일, 동아일보가 경찰 발표를 뒤집고 일어섰다. (당시 정부는 경찰 발표를 보도할 경우 ‘사회면 4단’이라고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경찰 발표 뒤 보도를 요약해 보면, 고문치사 가능성이 크며 친척과 부검의 등 몇몇 사람들의 증언이 이를 소상히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조작해 2명의 경관(조한경 경위·강진규 경사)만 ‘희생양’으로 체포한 경찰. 당시 호송 중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차량 속 경관들이 똑같은 복장을 갖춰입는 꼼수까지 부렸다. 출처 : <기자가 본 ’88 100대 뉴스>
Q. 물고문 치사로 단정하는 데 있어 결정적 단서가 오연상 의사의 증언 아닌가.
“오씨 취재는 내가 담당했다. ‘용기있는 시민’이 역사의 물줄기를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가늠케 해보는 대목이기도 하다. 박군의 첫 검시자가 오씨라고 데스크(차장급 내근자)한테 연락받고 (중앙대) 용산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식사를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막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진료 기다리는 환자들을 밀치고 다짜고짜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 박군 사건이 갖는 심각함을 강조하면서 공권력의 타락성을 성토한 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Q. 요즘엔 기꺼이 용인하는 취재방식이 아니다. 어쨌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나.
“30분이 넘도록 나 혼자서 펄펄 뛰는데도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의사 집안에서 자라 받은 가정교육 탓인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해 보였다.”
윤 기자는 “공격적으로” 태도를 바꿨고, 의사는 곧 대기 환자들과 간호원을 밖으로 물리쳤다고 한다.
“대공분실에 불려갔다는데 거짓말을 할 겁니까?
의사로서 양심을 걸고 솔직히 말해 주십시오”라는 기자의 두 마디를 들은 뒤였다.
Q. 오씨가 불안해하면서 설명한 것으로 영화에선 나오는데.
“
그는 ‘취재원을 보호해 달라’거나 ‘지나친 과장 표현은 삼가달라’는 식의 조건을 붙이지 않았다. (나중에)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신문에 게재했다.”
고문사실을 알린 오연상 의사의 당시 모습(위 왼쪽)과 영화 속 모습(배우 이현균·위 오른쪽). 이어 내과를 운영 중인 현재의 모습(아래). 한겨레 DB
Q. 설명 내용은?
“박군이 숨진 14일 오전 11시30분경 경찰관 2명이 허겁지겁 찾아와 급한 환자가 있다기에 남영동 대공분실로 갔다. 도중 환자 상태를 물으니 ‘조사 도중 호흡이 불안정해졌다’고 경찰관들이 말했다더라. 조사실에 도착한 즉시 박군의 눈동자를 살펴보고 심전도 호흡상태를 점검해보니 이미 숨져 있었고, 기관지에 튜브를 집어넣어 인공호흡을 시키고 갬퍼주사를 놓은 뒤 30분 동안 심장 마사지를 계속했으나 박군의 심폐기능이 소생되지 않았다고 했다. 박군은 의사 도착 전에 이미 죽었던 것이다.”
Q. 물고문 치사를 전문가가 확인해준 첫 순간이었을 텐데.
“(오씨는) 박군에 대한 소생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경찰관으로부터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실제) 박군의 복부가 팽만해 있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고 말했다. 조사실 바닥에는 물기가 축축했다고도 했다.”
윤 기자는 이 대목에서 오씨의 말을 가로막았다고 했다. “물고문에 의한 치사를 입증해주는 결정적 단서”라며 회사에 전화로 보고했다. 그는 “핵심은 폐에서 들린 수포음”이라고 말했다. 언론계 은어로, 물고문을 입증하는 ‘야마’였던 셈이다.
1999년 박처원 전 치안감이 타고 다녔던 볼보 승용차. 당시 고문으로 악명높은 이근안 경관의 도피 배후로 드러나기도 했다. 한겨레 DB
Q. 검찰은 5월17일 즉시 물고문 사실을 인정했고,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박군 사건 재보강 수사결과라며 발표했다.
“물고문으로 질식사했고, (책임을 물어) 고문경관인 조한경 경위(41), 장진규 경사(29)를 구속했다는 내용이었다. 서울대 민추위(서울대 민주화추진위) 사건 수배자인 박종운(21·서울대 사회복지학4년 제적·
이후 그는 박종철씨 부모의 양아들을 자처했지만, 2000년대 한나라당에 입당해 거듭 출마하는 정치인으로 또 변신했다)군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 연행해 조사하던 중 진술을 거부해 두 경관이 욕조에 머리를 밀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사망했다는 것인데,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고 둘러댄 거짓말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경찰의 2차 자체 수사결과 발표 때의 강민창 치안본부장(왼쪽 위)와 <1987>에서 1차 사건발표(이른바 “탁 치니 억하고”)하는 강 본부장(배우 우현·왼쪽 아래). 이어 이듬해 사건조작 혐의로 구속되는 강 본부장(오른쪽). 출처 : <한국기자상 30년>, 영화 스틸컷
Q. 하지만 해당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는 그 선에서 사실 멈췄던 것 아닌가.
“한 대학생의 죽음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역동적 시민, 학생, 재야단체, 종교인, 야당 정치권의 단합된 힘이 정권의 존립을 위협해 나갔다. 시위와 봉쇄, 수배와 구속, 돌과 최루탄이 뒤엉켜 몹시 어수선한 가운데 몇 달이 흘러갔다.”
박군 고문치사 사건 자체는 점차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져갔고, 급기야 4·13 호헌조치가 내려져 반정부 운동이 주춤거리기도 했다.
Q. 제2의 도화선은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고문경관이 더 있고, 사건이 축소은폐됐다”는 선언이었다.
“(사실) 이 얘기를 술자리에서 모 후배로부터 언뜻 들었으나 연일 데모취재 등으로
심신이 극도로 피곤하였고, 한편으로 나태한 탓도 있어 소문의 진원지를 확인하지 못한 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고문 혐의로 구속된 경관들 가족들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 볼걸…’. 사제단 선언 직후 무릎을 치며 스스로 한탄했던 말이다.”
검찰은 이후인 21일 황정웅 경위(41), 반금곤 경장(44), 이정호 경장(29) 3명을 추가 구속한다. 대신 축소은폐 조작 과정에서 경찰의 윗선 개입이 없었고, 검찰은 조작 사실을 5월 초 인지했다고 덧붙였다. 언론 고발을 통해 이 또한 거짓으로 판명되며, 신군부는 더 큰 위기를 맞게된다.
Q. 기자가 들추려고 하는 건 누군가 목숨 걸고 감추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취재가 고되고 그래서 수사권까지 꿈꾸는 망상을 하기도 한다.
“김차웅 기자가 검찰 발표 다음날인 5월22일 출입처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물어보던 중 한 간부에게 “경찰이 참 어리석다. 이번 일은 유정방 과장과 박원택 계장이 개입해 조작한 것 아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그 간부가 “그런 엄청난 일을 일개 과장이나 계장이 결정할 일이냐”고 도리어 힐난성 반문을 했다. 김 기자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하더라. (결국 윗선을 찾다) 당시 현직을 떠난 한 고위 간부를 통해 ‘박처원 치안감 등 3명이 처음부터 개입해 고문경관 5명 중 2명만 범행한 것으로 조작했다’는 내용 확인하고 다른 간부를 물고 늘어져 재차 확인한 뒤 마감시간이 임박해 공중전화로 송고, 1면 톱기사로 기사화했다.”
Q. 당시엔 기사를 전화로 불러 송고했다는 점이 지금 시민들에겐 흥미로울 것 같다. 영화에서도 필사적으로 공중전화를 찾아 달리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때 김 기자는 기사송고를 마치고 전화받았던 후배 기자에게
“내가 이 기사 때문에 구속되거든 구속 기사는 자네가 써주게”라고 말할 정도로 비장한 심정이었다고 털어놨다.”
해당 보도 이후, 즉 물고문 살인 및 사건 조작은폐가 자행된 지 5개월 만에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정호용 내무장관, 김성기 법무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이영창 치안본부장이 물러났다.
사실상 개각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던 ‘꼼수’이기도 했다. 당시 정호용 내무장관은 이임식 자리에서 “언론이 사실무근한 일을 마구 써대는 바람에 국민이 수까마귀인지 암까마귀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이번 사태는 언론이 책임져야 하며 언론이 나라를 망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비난했고, 박 치안감도 검찰 조사 뒤 아무 일 없듯 풀려났다.
박처원 치안감(왼쪽)과 그를 연기한 배우 김윤석(오른쪽). 한겨레 DB
박처원 치안감과 함께 뒤늦게 체포된 실무책임자 유정방 경정(위 왼쪽, 오른쪽은 그역의 배우 유승목)과 박원택 경정(아래 왼쪽, 오른쪽은 그 역의 배우 현봉식). 출처 : <기자가 본 ’88 100대 뉴스>
하지만 이 조차 검찰이 사건 축소은폐 조작 사실을 2월께 이미 파악했다는 추가 보도로 힘을 잃게 된다. 검찰은 일단 ‘무마용’으로 박 치안감 등 3명을 구속해야 했다.
급기야 박종철 열사가 숨진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1988년 1월14일 강민창 치안본부장까지 소환되고, 이튿날 구속됐다. 사실상 강 치안본부장이 사건 은폐조작의 주범인 동시에, 황적준 박사에게 ‘사인을 조작하라’고 회유하고 지시한 정황까지 언론 보도로 드러난 덕분이었다.
윤 기자는 “(동료 기자가) 황 박사를 만나 끈질기게 설득해 박군 사건 당시 기록해둔 일기장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일기로 정리해둔 이유에 대해 훗날 사건을 공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진실을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
‘박종철 고문사’ 밝힌 검사와 의사, 30년 만에 만났다>)
부검결과 조작 지시를 거부하고 일기까지 남긴 당시 황적준 국과수 부검의의 현재(왼쪽). <1987년> 영화 속 그의 모습(배우 김승훈·오른쪽). 한겨레 DB.
감추려는 권력자와 들추려는 이들의 집요한 공방이 1년 만에 종결될 수 있던 계기이며, 실상 기자는 시민의 양심과 신뢰 없이 온전히 직립보행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윤 기자가 마지막 남긴 말의 외연이 이렇께까지 확대될 수 있는 이유로도 보인다.
“특종은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기자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얻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박군 고문치사 사건 특종은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에 찬 ‘용감한 보통사람’과 관련 내부의 ‘양심세력’들이 준 선물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