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정보공개센터) 활동가들이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운영시간 안내문을 들어보이고 있다. 주 4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는 정보공개센터에서 활동가들은 대체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일한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광고회사 ‘크리에이티브마스’에서 1년3개월째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는 이한나(28) 대리는 입사 전 회사의 채용 광고를 처음 봤던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회사 소개 부분에 ‘주4일 출근제’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땐 ‘에이, 주4일 출근하는 데가 어딨어. 그냥 홍보용이겠지’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입사하고 나니까 진짜 주4일 출근을 한다는 거예요.”
패션잡지 에디터로 약 3년간 일하다 퇴사한 이씨에게 ‘주4일 출근제’는 삶을 바꿔준 가뭄의 단비였다. “예전 회사에서 일할 땐 새벽 퇴근도 종종 하고, 이틀 밤을 꼬박 새워서 작업물을 넘겨야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불규칙하게 야근하다 보니 많이 지쳤고, 결국에는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퇴사를 결심했었죠.”
이한나 대리가 일하는 크리에이티브마스는 2014년 회사 설립 때부터 주4일 출근제를 시행하고 있다. 장시간 노동으로 유명한 ‘광고업계’에서 유일무이한 사례다. 월~목과는 달리 금요일은 회사로 출근하지 않는다.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있으면 집 근처 카페에서 잠시 처리해도 되고, 당장 할 일이 없다면 쉬거나 여행을 가도 상관없다. 이 대리는 “여유가 있는 근무 환경에서, 내가 즐거운 일을 할 수 있으면 그게 ‘워라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지난 12월 정부가 발표한 ‘2018년 경제정책방향’의 일자리 관련 정책에는 ‘근로시간 단축, 휴식 보장’이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소요되는 신규 채용과 기존 근로자 임금감소분에 대한 정부 지원을 확대하고, 대체공휴일과 연월차 사용을 유도한다는 것이 주요 뼈대다. 정부가 앞장서 ‘쉼표 있는 삶’을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광고회사 ‘크리에이티브마스’
자율출퇴근·근무시간 예술 향유
월~목 근무·여름겨울 1주일씩 휴가
사장 “되레 회사 성장해 고용 늘려”
직원 “여유롭고 즐겁게 일해 워라밸”
‘서울신보’, 연장근무땐 승인받아야
근로시간 저축해 필요할 때 휴가
신세계 주35시간 근무제 등
서비스 직종 중심 근로단축 확산
인력충원 뒷받침이 성공 밑거름
이런 정부 움직임은 극단적 장시간 노동에 의한 ‘과로사회’에 대한 반성이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오이시디)가 발표한 ‘2017 고용동향’을 보면 2016년 기준 국내 취업자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069시간으로, 오이시디 회원 35개국 가운데 멕시코(2255시간)에 이어 두번째로 긴 것으로 나타났다. 오이시디 평균(1764시간)보다는 305시간 많았다. 장시간 노동은 삶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 지난해 오이시디가 공개한 ‘더 나은 삶의 지수’(BLI·Better Life Index)를 보면, 한국은 38개국 가운데 ‘일과 삶의 균형’, ‘삶에 대한 만족도’에서 각각 35위, 30위 등 하위권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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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 핵심은 ‘시간 복지’ <한겨레>는 직원들의 워라밸 보장을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 복지’를 주도하고 있는 기업을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워라밸 세대 직장인들은 “직원들에게 각자의 시간을 보장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사내 복지”라고 입을 모았다.
이한나 대리가 근무하고 있는 광고업계는 사실 ‘대중교통이 끊긴 뒤 택시를 타고 귀가한다’는 것이 상식일 정도로 야근이 만연한 직종이다. 광고주가 제시한 마감시간에 맞춰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게 기본 업무인 탓이다. 크리에이티브마스가 과감하게 주4일 출근제를 도입한 데는 ‘직원들에게 시간을 선물로 주겠다’는 이 업체 이구익 대표의 의지가 컸다. 이 대표는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데, 회사에서 힘들면 그 자체로 ‘인생이 힘들다’고 여기게 된다”며 “고참이 퇴근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거나, 늦게까지 야근을 해야만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기업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크리에이티브마스에서 운영하는 ‘시간 복지’는 주4일 출근제뿐만 아니다. 여름과 겨울엔 각각 ‘여름·겨울 방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임직원이 1주일간 휴가를 떠난다. 연차도 차감되지 않는 보너스 휴가다. 각자 일하기 편한 시간에 일할 수 있도록 자율출퇴근제를 시행했고, 근무시간에 동료와 함께 영화·전시·공연 등을 관람하는 ‘예술로의 출근·퇴근·외근’ 제도도 운영한다.
예상과 달리 회사의 규모는 커졌다. 1인 기업으로 시작했던 크리에이티브마스는 불과 1년6개월 만에 직원 8명을 새로 채용했고, 채용과 연계된 인턴도 4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 대표는 “경영자로서 주4일 출근제를 유지하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지만, 10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업무량과 업무시간이 업무 성과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복지제도를 확대하면 다른 광고회사에 비해 이직률이 줄고 자연스럽게 인수인계 등의 기회비용이 줄어드는 것도 장점”이라고 했다. 광고업계 특성을 고려했을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데도 ‘시간 복지’ 강화가 유리하다는 게 이 대표의 생각이다.
이처럼 근로시간 단축 시도는 서비스 직종을 중심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음식 배달 앱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 형제들’은 2015년부터 월요일 출근을 오후 1시로 늦췄고, 올해 3월부턴 오후 6시30분이던 퇴근 시간을 오후 6시로 앞당겼다. 숙박 앱인 ‘여기 어때’를 운영하는 위드이노베이션도 지난 4월 우아한 형제들과 같은 출퇴근 제도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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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 단축이 능사 아냐…업무 덜기, 인력 충원 뒷받침돼야 주4일 출근제를 선도적으로 도입한 기업들은 ‘단순히 업무시간만 줄이는 건 능사가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절대적인 업무량을 줄이거나 인력 충원이 수반되어야 근로시간 단축이 실효성을 갖기 때문이다. 2015년부터 주4일 출근제를 시행하고 있는 시민단체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는 지난해 2명의 활동가를 추가로 고용했다. 3명이었던 활동가는 5명으로 늘었다. 센터의 김유승 소장은 “활동가들이 지속가능하게 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주4일 출근제나 안식년·육아휴직 등의 복지를 보장하려면 절대적인 인력 충원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월 1회 주4일 출근제를 시행하고 있는 여행사 ‘여행박사’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여행박사는 2015년부터 월 1회 오후 3시에 퇴근하는 ‘라운지 데이’를 시행했는데, 직원들의 반응이 좋아 지난해 8월부터 격주로 주4일제를 시범 도입했다. 그러나 11월부터는 주4일제 운영을 다시 월 1회로 줄였다. 일부 직원들이 금요일에 오는 고객 요청에 실시간으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건의했기 때문이다. 황주영 대표는 “회사 규모가 작다 보니 시간 복지와 관련된 여러 실험을 할 수 있었다”며 “지난해 있었던 제도 변경도 직원들과 소통하며, 우리에게 최적화된 노동 환경을 결정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매출과 성장이 담보되는 한 최대한 근로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행박사는 자율출퇴근 제도에 더해, 연차나 반차를 시간 단위로 쪼개 쓸 수 있는 ‘시차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시간 복지’는 직원들의 삶의 모습과 직접 연결된다. 2년 동안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일하다 지난 11월 여행박사로 이직했다는 김현경(28)씨가 새 직장을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건도 ‘시간 복지’였다. 김씨는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더라도 잘 다닐 수 있는 회사인가’를 가장 많이 생각했다”며 “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해 일할 수 있다 보니 실제 사내에 아이를 낳고도 안정적으로 회사를 다니는 여자 선배가 많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직원 330여명 중에 80%가 여성이라서 자연스럽게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복지 제도들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며 “무엇보다 가정에 시간을 쏟길 바라는 경우가 많아 지원자들에 한해 근무시간을 하루 5시간까지 줄이는 방법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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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 지자체·대기업도 나선다 지난 3일 오후 5시 서울 마포구에 자리한 서울신용보증재단(서울신보) 경영지원부 조기정 차장의 컴퓨터 모니터 한가운데에 팝업창이 떴다. ‘시간 외 근무 관리. 종료 전입니다. 17시30분까지 연장근무 신청 및 승인을 받아야 피시 사용이 가능합니다.’ 지난해 5월부터 시행된 월·수·금 ‘피시오프 제도’다. 각자 지정해둔 퇴근 시간에 맞춰 30분·10분·5분 전 팝업창이 떠 업무를 마무리하도록 독려한다. 조 차장은 “월·수·금요일은 가능한 한 퇴근 시간에 맞춰 일을 끝내야 하고, 피치 못하게 야근을 할 경우 사전에 연장근무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신보에서 도입한 피시오프 제도는 ‘서울형 노동시간 단축 모델’의 산물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초 ‘서울형 노동시간 단축 모델’의 시범사업장으로 서울신보를 선정했다. 서울시 자체 연구 결과 서울신보의 사무직노동자 213명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275시간으로 조사됐는데, 이를 토대로 2017년부터 2022년까지 1815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단계적으로 줄여나가기로 한 것이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추가 업무를 부담하기 위해 올해 10명을 신규채용했고, 2021년까지 단계적으로 모두 27명을 채용할 예정이다. 지난해 5월부터는 ‘피시오프 제도’에 더해 근로시간을 모은 만큼 연차처럼 쓸 수 있는 ‘근로시간 저축 계좌 제도’도 시행하고 있다. 현재는 육아나 학업 등의 사유가 있을 때 근무시간을 하루에 4시간까지 단축할 수 있는 제도를 검토하고 있고, 올 상반기에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지난해 5월 서울신보에 입사한 ‘워킹맘’ 황태희(가명·34) 주임은 근로시간 단축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7살 아들, 5살 딸을 키운다는 황 주임은 지난해 연말 근로시간 저축 계좌 제도로 연말 휴가를 보냈다. “2017년 누적된 추가 근무가 40시간이 넘어서, 12월 마지막주 4일 동안 휴가를 쓸 수 있었어요. 아이들 유치원에서 하는 재롱잔치도 가고, 둘째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도 데리고 다니고요.” 황씨는 “사내에 ‘칼퇴근’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퍼지니 확실히 업무시간 집중도는 높아진다. 아이 키우는 직장인을 위해서라도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근로시간 단축을 뼈대로 한 ‘시간 복지’는 민간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신세계는 올해부터 이마트 등 전 계열사의 근로시간을 주당 35시간으로 전환했다. 이를 위해 이마트 점포 73곳의 폐점 시간을 밤 12시에서 11시로 1시간 단축하고, 사무직은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9-to-5 제도’를 적용하기로 했다. 일각에서는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피해가려는 꼼수’, ‘서비스 업종이니까 가능한 이야기’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근로시간 단축을 추진하는 정부 방향과 궤를 함께하는 시도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추고, 산업재해나 직업병 위험을 축소하는 근본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절대적인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라며 “노동시간을 줄인다는 기조 아래 ‘이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은 누가 부담할 것인가’, ‘정부는 기업의 부담을 얼마나 나눌 것인가’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