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회사 부당처우 신고·상담하는 ‘직장갑질 119’ 채팅방엔 무슨 일이…
한림성심병원 ‘갑질’ 세상에 알린 민간 공익단체 출범, 보름의 기록
회사 부당처우 신고·상담하는 ‘직장갑질 119’ 채팅방엔 무슨 일이…
한림성심병원 ‘갑질’ 세상에 알린 민간 공익단체 출범, 보름의 기록
11월1일 오후 1시. 사무실에 앉아 인터넷 주소창에 ‘직장갑질119’(gabjil119.com)를 치고 ‘그룹 오픈채팅 참여하기’를 누른다. 채팅방 인원 20명. 출범 기자회견이 끝나고 운영진(스태프)이 먼저 방에 가입했다. 두근거린다. 직장 다니는 누군가가 찾아와 억울한 사연을 호소해야 하는데, 몇 사람이나 들어올까? 신장개업을 한 가게 주인처럼 채팅방을 떠나지 못하고 초조하게 손님을 기다린다.
첫 신고는 국가기관 갑질
오후 3시. 채팅방에 새 소식이 올라온다. ‘지나가는사람’님이 들어왔습니다, ‘용용’님이 들어왔습니다, ‘갑질’님이 들어왔습니다, ‘둥글게둥글게’님이 들어왔습니다, ‘훈’님이 들어왔습니다, ‘Yesgood’님이 들어왔습니다…. 익명의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출범한 직장갑질119 스태프 박점규입니다. 이곳은 직장에서 겪은 부당한 대우와 갑질을 고발하고,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공간입니다. 조금은 어색한데요, 궁금한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눈팅만 하고 계셔도 되고요^^”(오후 3시9분)
언론에 보도된 기사 몇 개를 추려 채팅방에 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3시12분. 아이디 ‘Yesgood’이 말문을 텄다. “전 국가기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상사의 인격 모독적 폭언에 업무를 못하고 있습니다. 퇴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억울하고 분해서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직장갑질119에 신고된 첫 번째 사연이 갑질을 해결해야 할 국가기관이었다.
“일요일 밤 11시에 전화 안 받았다고 쌍욕 먹었습니다. 살려주세요. 매일 야근 기본 12시까지 하고 간혹 새벽 4~5시까지도 합니다. 야근수당 없고요. 한번은 쉬지도 않고 37시간 일한 적도 있네요.”(용용)
“간호부장께 찍힌 게 육아휴직과 연차 개수를 노동부에 알아봤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일개 직원이 노동부에 알아본다고, 세금 먹는 회충이라는 소리도 듣고. 이런 게 현실이네요.”(아지맘)
‘회사쭈구리’ ‘돈떼먹지마라’ ‘곧퇴사예정’ ‘고민’ ‘갑질반대’라는 이름이 속속 들어온다. ‘몸도마음도언제나겨울’ ‘이사에게복수를’ ‘힘들다’ ‘을오브을’ ‘돈내놔’ ‘지만잘났어’…. 익명이 보장되는 방에 들어오면서 본명을 감추고 지은 ‘웃픈’ 이름들이다. “다들 이렇게 사시나 해서ㅜㅜ 들어와봤어요.ㅜㅜ”(용용)
직장갑질119 스태프가 하나둘 등장한다. “두 분이 직장에서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정말 화가 납니다.”(윤지영) “사무직은 야근수당 안 줘도 된다니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보네요….”(박성우) “쩜님 아 진짜…. 관할 노동청에 몰래 투서라도 넣어볼까요? 인간들이 인간이 덜 되었네요, 진짜.”(박혜영) “어머나, ‘상’ 갑질이군요.”(구교현)
말을 받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말 몇 마디를 건네자 하소연이 쏟아진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대표 전자우편(gabjil119@gmail.com)을 안내한다. 수다가 쉼없이 이어지고 참여 인원이 하나둘 늘어난다. 첫날 채팅방 48건, 전자우편 7건 등 58건의 고발이 접수됐다.
노조 만들 엄두도 못 내는 직장인들을 위하여
촛불이 서울 광화문광장을 밝히던 겨울이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광화문역 9번 출구. 대부분의 시민이 행진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광화문역을 나와 촛불을 받아들고 광장으로 향하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토요일까지 야근을 해야 하는 청년, 궂은일과 부당한 대우에 시달리며 긴 하루를 보냈을 친구들의 지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광장의 민주주의가 직장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정권이 바뀌어도 고단한 청춘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들과 몇 차례 토론을 벌였다. “직장을 바꿔! 누구나 노조가 필요해”라는 모토로 노조 결성 운동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왔다. 공개 토론회를 다섯 차례 열었다. 300명 이상 사업장(62.9%)과 공무원(66.3%)의 노조 가입률은 유럽 수준으로 높은데, 100명 미만 사업장(2.7%)과 민간부문(9.1%)은 매우 낮았다. 사장과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사람들이 노조를 만드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노조를 만들고 싶어도 차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중소기업 직장인, 이들에게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 다섯 달을 머리를 싸매고 논의한 끝에 대략 얼개를 잡았다. 직장인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정류장으로 삼기로 했다. 부담 없이 갑질을 신고하려면 익명으로 가입할 수 있어야 했다.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고민을 나누다, 더 깊은 고민은 전자우편을 통해 주고받기로 했다. 비슷한 직업군이 많아지면, 네이버 밴드에서 업종별 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노무사, 변호사, 노동 전문가 241명을 모았다. 이름은 ‘직장갑질119’로 정했다.
문제는 민간 공익단체의 출범을 알리는 방법이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에 의뢰해 직장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기로 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가 통장을 털었다. 민주노총 법률원, 사무금융노조 등 참여단체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 직장인 71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10명 중 7명이 ‘직장 갑질을 당했다’고 답했다. 기대와 우려를 안고 11월1일 문을 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보름 동안 전자우편 제보 364건을 포함해 700건 넘는 제보가 쏟아졌다. ‘임금을 떼였다’(19%)가 가장 많았고 ‘직장 내 괴롭힘’(18.3%), ‘노동시간’(15.4%), ‘휴가 미보장’(11.7%) 순이었다. ‘일방적 인사 조처’(8.5%), ‘부당한 징계와 해고’(7.1%), ‘성폭력’(3%) 등의 상담도 있었다.
11월2일 오전 11시13분, ‘적폐한림청산일송’이 카톡방에 나타나 “혹시 이 자리에 한림대성심병원 계열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한정애·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이 터트린 JTBC 뉴스 이후 한림대 재단 인사팀이 그다음 날 관련 PC 전부 파기”라는 소식을 올렸다. 그때부터 성심병원 간호사와 직원이 하나둘 방에 나타났다. 체육대회, 선정적 장기자랑, 강압적 화상회의, 수당 미지급 등 제보가 빗발쳤다. 성심병원 간호사들은 친구와 동료들을 불러왔다. 강병원 의원실에서 연락이 왔다.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하겠다며 제보를 모아달라고 했다.
환자 유치·검진권 구매·이삿짐 운반 강요
11월7일까지 전자우편 19건, 카카오톡 오픈채팅 130건을 모아 ‘한림성심병원 갑질 보고서’를 만들어 의원실에 전달했다. 한 언론사에서 보고서를 입수해 ‘행사 동원돼 선정적 춤… 간호사 인권 짓밟는 성심병원’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고, 성심병원 직원들이 다시 카카오톡으로 모여들어 제보를 쏟아냈다. 직장갑질119 회의를 열었다. 성심병원 담당 노무사·변호사·담당자를 정하고, 네이버 밴드에 ‘노동존중 한림성심병원 모임’을 만들었다. 이틀 만에 100명이 들어왔고, 얼마 뒤 200명을 넘겼다.
“신환자 유치를 직원들에게 강요하고 리포맥스(내부망)에 전 직원이 볼 수 있게 관리하고 확대부서장 회의에서 행정부원장이 부서별로 성과를 발표. 부진한 부서에는 신환자 소개하라는 행태.”
“건강검진권을 병동당 할당하여 성과 부족금을 채운다고 강매한 적이 있어요. 병동에 5~6명씩. 요즘 실비(보험) 다 있는데 저도 어쩔 수 없이 사서 동생에게 줬더니 추가 비용 발생 항목이 있어(위내시경 기본인데 대장내시경도 원할 경우) 돈을 더 내야 한다고 해서 실비로 하면 되는데 추가 비용 내서 하고 싶지 않으니 내시경은 안 하겠다고 했지만 나머지 비용은 환불이 안 된다더라고요.”
병원이 간호사와 직원들에게 영업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삿짐을 나르게 하고, 병원 광고지를 배포하게 했다. 강동성심병원은 부서별로 주차 관리를 시켰다. 회식 자리 성희롱도 빠지지 않았고, 병동에서 체온계 같은 의료기구가 분실되면 간호사가 개인 돈으로 채워넣어야 했다. 고용노동부가 성심병원에 근로감독을 하겠다고 하자, 병원이 컴퓨터 서버를 교체하는 등 증거인멸을 하고 있다는 증언이 줄을 이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고용노동부에 전화를 걸어 면담을 요구했다. “직장갑질119에 쏟아지는 갑질 신고를 보니,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사이 직장이 지옥으로 변했고, 갑질이 재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고용노동부가 직장 갑질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시급하게 마련해야 합니다.”
안경덕 노동부 노동정책실장은 “우리가 못한 부분을 대신해줘서 감사하고, 우리도 적극적으로 하겠다. 다음번에 만나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자”고 했다. 직장갑질119에 제보된 내용 중 신뢰할 만한 사건은 해당 사업장 전반에 조사가 필요하다고 할 경우 근로감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노동부 면담 소식을 올리자 성심병원 밴드 사람들은 떠나갈 듯 환호했다.
대기업 관련 회사에 다니다 퇴사한 제보자를 만났다. 인격 모독, 수치심, 감금, 성희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갑질을 당했다고 했다. 지금도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 고용노동부, 국가인권위원회, 경찰을 찾아갔지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가 용기를 낸 이유가 있었다. 후배들이 자신이 당한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직장갑질119를 찾은 사람들은 비정규직, 여성, 20대가 많았다. ‘갑질러’는 오너와 관리자만이 아니었다. 국장이 파견직 사원을, 정규직 대리가 계약직 여성을 괴롭혔다. 직장 구하기 힘들고 비정규직이 많아지면서 회사가 계급화·위계화됐고, 갑질은 더 심각해졌다.
국가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상처를 입고 찾아갔는데 노동부나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귀찮은 사람 취급을 당해야 했다. 월급 28만원을 떼인 한 대학생은 노동부에 당한 설움을 장문의 편지로 보내왔다. 국가가 외면한 사람들이 직장갑질119를 찾았고, 고민을 들어주고 사연에 공감해주는 것만으로 고마워했다.
그런데 당신 회사는?
직장갑질119에 죽고 싶다는 절규가 끊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지옥문이 열렸다고 했다. 아니, 이제야 우리가 지옥을 들여다보게 된 게 아닐까? 10~20년 동안 노동 상담을 해온 노무사와 변호사들도 방에 올라오는 사연을 보며 큰 충격을 받고 있다. 마치 중독된 듯 카톡방에 들어가 대화를 나눈다.
지금 이 시간, 무슨 사연들이 들어오고 있을까? 잠시 성심병원 밴드를 들여다본다. 병원에서 특판 행사를 열어 속옷을 팔고,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에게 특판에 가서 물건을 사라고 강요했다는 증언이 쏟아진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그런데 여러분 회사는 어떠세요?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직장갑질119 스태프
직장인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고발하고 바로잡는 사회적 캠페인 ‘직장갑질 119’의 스태프들이 지난 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4층에서 공식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한 뒤 거울로 ‘갑질 반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직장갑질' 관련 제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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