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씸죄라는 말이 있다. 물론 법전에는 없는 죄명이다. 판사에게 잘못 보이는 것도 죄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판사에게 밉보이면 형량이 올라간다는 것. 문제는 불리한 사건에서 자백하지 않고 본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종종 밉보이는 지름길이라는 점이다.
나의 의뢰인 김씨는 도무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김씨는 평소 몇 번 만났던 여성과 술을 마시다가 그 여성이 자신의 집에 가서 술을 더 마시자고 권유하여 여성의 집에 간 뒤 성관계를 가졌다. 김씨는 침대에서 여성이 별말이 없어 성관계에 합의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다음날 두 사람은 잘 들어갔느냐는 문자도 주고받았다. 그런데 수일 뒤 여성은 김씨를 강간죄로 고소했다. 본인은 집을 숙소로 제공할 것까지만 생각했고 성관계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김씨가 침대로 올라와 강제로 성관계를 시도해 반항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변호사로서 끝까지 무죄 주장을 해보자고 권유했다. 억울한 마음이 쌓이면 한이 되는 것을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씨는 끝내 자백을 결심했다. “변호사님, 단둘이 있던 방에 제 결백을 입증할 목격자도 없고 증거도 없는데 괜히 우기다가 판사님한테 괘씸죄나 걸리면 어찌합니까!” 우리는 여성과의 금전 합의 중심으로 사건을 진행하기로 하고, 김씨가 반성한다는 점을 반성문으로 충분히 표현하기로 했다.
김씨의 ‘괘씸죄’ 걱정을 법적 용어로 바꾸면, 증거가 부족한 사건에 무죄를 주장하다가 무죄도 안 나고 자백했더라면 받을 수 있는 ‘작량감경’도 못 받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우리 형법 제53조는 작량감경이라는 제목으로 ‘피고인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으면 판사가 형량의 절반까지 깎아주는 제도’를 두고 있다. 무려 절반이라니! 작량감경의 효과는 대단할 수밖에 없다. 법에 의하면 꼼짝없이 실형을 받을 사람도 작량감경을 받으면 집행유예로 교도소 문을 나갈 수 있다. 이 ‘어메이징’한 작량감경의 포인트는 두가지다. 일단 법률에 정해진 감경 사유가 없더라도 법률로 정한 형이 범죄에 비추어 과중해 보이면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로 그 판단은 바로 법관이 재량으로 한다는 것이다. 입법자에 버금가는 막중한 권한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판사는 피고인이 자백하고 반성할 때만 형을 깎아준다는 점이다. 여기서 사람들의 고민이 시작된다. 무죄를 주장하자니 작량감경 혜택(?)을 못 받을 게 뻔하고, 그렇다고 싸워보지도 않고 자백을 하자니 너무 억울한 것이다. 증거가 애매해 무죄가 날지 가늠하기 어려운 사건의 경우 시름은 더 깊어진다. 공소사실이 자신의 기억과 약간 다르더라도 괜히 부인하지 않고 그냥 자백하고 “반성하겠다”고들 한다. 답답한 노릇이다. 유독 우리나라 피고인들이 판사에게 반성문을 여러 장씩 제출하고, 누가 형사 재판을 받는다고 하면 주변에서 이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탄원문을 돌리며, 법정에서는 혹시라도 판사의 심기를 거스를까 언동을 조심하는 것도, 이런 작량감경 권한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판사의 ‘재량’으로 법정형을 감경해주는 제도를 두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일본 외엔 많지 않다고 한다. 독일과 스위스에 ‘정상감경’이라는 제도가 있지만, 판사 재량으로 형을 깎는 건 아니고 감경 기준이 법에 규정되어 있다. 우리 작량감경은 1953년 형법을 제정할 때 일본 형법 제66조에 ‘범죄의 정상이 민량(憫諒·가엾게 살피다)할 바 있는 것은 작량하여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을 수용한 것이다. 천황제 국가인 일본의 작량감경 제도는 천황이 피고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죄를 감해 준다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주권은 국민에게서만 나온다. 국민이 선출한 국회가 만든 법에 의한 감형만이 타당하지 않을까.
작량감경 제도가 중형주의로 인해 법정 하한형이 비교적 높은 우리 형법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법관이 사안을 잘 살펴서 억울한 점이 있는 피고인을 위해 적절하게 형량을 낮춰주는 순기능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준은 명확히 법전에 있어야 하고 어떤 이유로 작량감경했는지도 판결문에 명확히 써야 한다. 그래야 괘씸죄라는 말이 없어진다.
조수진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