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29일 일제는 한국을 강제병합했다. 8·29 국치일 107돌을 맞아, 일제가 간도를 교두보 삼아 한반도는 물론 만주 대륙 침략을 감행한 실증적 자료인 통감부 간도파출소 제작 <간도사진첩>의 원본이 공개됐다.
간도 명동촌의 개척자 김약연 선생을 기리는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사무총장 김재홍)은 28일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1910년)에 부록으로 첨부됐던 ‘간도사진첩’을 <한겨레>에 제공했다. ‘통감부…기요’는 국제법 전공학자로 간도파출소 총무과장을 지낸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훗날 경성대 총장)가 1910년 작성한 극비보고서로, 1984년 서지학자 이종학씨가 서울대 도서관에서 원본을 찾아냈다. 간도사진첩은 지난해 도쿄대 도서관에서 입수한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2개의 ‘간도사진첩’과 사진 내용은 거의 비슷하지만 편집이 다르고, 각장마다 촬영 시기와 설명이 달려 있어 명확한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1907년 8월 20일 일제는 사이토 스에지로 중장이 이끄는 헌병 61명을 선발대로 파견해 북간도 연길현 용정촌에 진주했다. 이어 23일에는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임의로 설치했다. 1905년 11월17일 이른바 ‘을사늑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906년 ‘을사오적’ 참정 대신 박제순으로하여금 ‘간도 거주 조선인 보호 요청’을 하도록 해, 이를 빌미로 사실상 만주 대륙 침략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사이토 일행은 ‘간도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며 간도(사이섬)의 지리적 범위를 두만강 이북의 연길, 화룡, 왕청, 무산 등지로 확대한 뒤, 기존의 청나라 행정시설을 무시한 채 임의로 구(区)와 사(社)를 설치했으며 ‘도사장제’를 도입해 친일 한인을 ‘도사장’으로 배치했다. 각지에 ‘헌병분견소’를 두고 청나라의 순관·순라병을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지방관원과 백성들을 체포하는 등 의도적으로 도발했다. 급기야 일제는 쇠락해가는 청나라 관리들을 구슬려 1909년 11월 불평등조약인 ‘두만강중한계무조항’(图们江界务条款), 즉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일제는 한국 회령으로부터 중국 길림에 이르는 ‘길회철도부설권’을 얻었고 용정, 투도구, 국자가, 배초구 등지를 통상구로 개방해 지역내 한인에 대하여 중국법에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영사재판권을 확보했다.
규암기념사업회 김재홍 사무총장은 “일제는 용정에 간도일본총영사관을 세운 뒤 그 전까지 임의로 설치했던 간도파출소 관련 흔적을 모두 없애고자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와 부록 ‘간도사진첩’ 같은 기록도 파기시켰기 때문에, 그 ‘원본’은 매우 희귀하고, 도쿄대 도서관 쪽의 협조를 끌어내기도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시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사진첩에 정작 그 시대 간도의 대표적인 한인 거주지이자 가장 번성한 지역인 명동촌 사진이나 언급이 빠져 있다”며 “이는 ‘한인 보호’라는 일제의 파출소 설치 명분에 명동촌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숨긴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모두 138장의 사진첩 가운데 상태가 선명한 30여장을 골라 소개한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 화보 새 창으로 보기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의 ‘부록 간도사진첩’ 표지.

간도사진첩 7쪽에 실려 있는 통감부 간도임시파출소 사무청사 전경. 1908년(메이지 41년) 10월 준공했다.

1907년 8월 통감부 간도 파출소 최초 고시. “대일본 통감부 파출소장 사이토 스에지로는 여기에 고시한다.(중략) 이에 본직이 이 땅에 온 것은 대한국 황제 폐하의 성의를 봉체하고 통감 각하의 명에 따라 오로지 너희들 한국인민의 신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그 복리를 증진시킴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중략)”

1907년 9월 통감부 간도파출소 설치 초기 임시사무소 팻말 앞에서 찍은 초대 파출소장 사이토 스에지로 중장의 모습. 북간도 용정촌에 있던 한간(漢奸·민족반역자) 정광제(程光弟)의 집으로 알려졌다.

간도파출소 제1기 간부들. 가운데가 사이토 소장.

간도파출소 초기의 일본 헌병대 간부들의 얼굴 사진.

1907년 9월 간도 파출소 가청사를 급조해 짓고 있다. 그해 10월 준공했다.

1907년 8월 간도파출소 초기에 사용했던 구청사.

1908년 11월 간도파출소 사이토 소장과 과장들.

1909년 8월 신축한 간도보통학교 전경.

헤이그 평화회의에 밀사로 간 이상설이 용정촌에서 경영한 서전서숙. 1908년 9월 촬영.

통감부가 용정에 설치한 간도우편국 전경.

간도파출소에서 운영한 간도구락부(클럽).

간도구락부에서 파출소 대원들이 당구를 치며 놀고 있다.

1908년 7월 간도보통학교 개교식. 간도파출소는 1906년 이상설 등이 설립한 민족교육의 산실 서전서숙을 폐교시킨 뒤 그 터에 보통학교를 지어 일제 식민 교육을 본격화했다.

간도보통학교 한인 학생들의 수업 장면.

1908년(메이지 41년) 11월 3일. 무쓰히토 메이지 천황의 생일 기념일인 천장절 축하회에 간도관·사립학도들이 모였다.

간도파출소 설치 1년 뒤인 1908년 8월 찍은 용정촌 전경.

1908년 8월의 용정촌 전경.

1908년의 용정시 시가.

간도파출소 설치 2년 뒤인 1909년 8월의 용정시. 특별히 ‘발전하는’이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다.

백두산 정계비. 1712년 조선(숙종 38년)과 청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한 뒤 함께 세웠다.

1909년 5월 상순에 백두산 정계비 앞에서 찍은 일본 임시 측량기사 오오타 일행. 간도파출소가 일본 헌병사령부 참모본부에 의뢰해 오오타 일행이 28일간 한국과 청나라의 경계를 시찰했으며,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는 시찰 보고서를 냈다는 기록이 있다.

백두산 용왕담. 천지의 옛이름이다.

무산간도 부동의 한인촌 전경.

천보산의 광산 사무소.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주 목적인 부존자원 조사를 샅샅이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용정 인근 노두구의 탄광 입구. 일제 지배가 본격화되면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강제 노역을 하다 희생됐고 무덤조차 없이 집단으로 묻힌 곳이다.

간도파출소에서 직접 경영한 부속 시범농원.

서부간도 대사하의 사금지.

간도 파출소의 시범농원에서 수확한 갖가지 야채들. 1908년 9월 촬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