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경기도 평택시 안정리에 있는 기지촌 할머니 쉼터 ‘햇살사회복지회’에서 할머니들이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의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김미영 기자
“이모들, 노래에 영혼을 담아야 해. 밀당을 좀 해야 해.”
“그건 내가 잘하지, 나 원래 좀 땡겼던 여자야. 깔깔깔깔깔”
지난 18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안정리에 있는 햇살사회복지회. 기지촌 할머니들의 쉼터인 이곳에서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기지촌 여성으로 불리던 할머니 다섯분에게 유성숙 음악감독이 노래지도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다음 달 12일 무대에 올릴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에서 부를 노래를 연습 중이었다. 평균나이 80살인 할머니들이 노래에서 음정, 가사, 감정 전달이 틀리거나 말을 보태 노래의 맥을 끊을 때마다 유 감독은 유머를 섞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모들, 제발 집중 좀 해줘. 5명 중에 3명이 음치야. 오~주여, 모세의 기적보다 더 강력한 기적이 필요합니다.”
기지촌 할머니들의 경험을 소재로 희곡을 써 무대에 올린 연극 ‘숙자 이야기’의 한 장면. 할머니들은 언론에 이름과 얼굴 공개를 꺼려 모자이크 처리했다.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 음악치료로 시작해 연극, 뮤지컬로 탄생
기지촌 할머니들은 전문 배우들과 함께 2012년부터 매년 연극 <일곱집매> <숙자이야기>를 공연해왔다. 지난해엔 뮤지컬까지 도전해 <그대 있는 곳까지>를 무대에 올렸다. 올해 공연은 재공연이다. 연극과 뮤지컬은 모두 기지촌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일곱집매>는 2013년 서울연극제 우수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이번 뮤지컬도 기지촌 할머니들의 경험을 담아 사랑, 이별, 그리움 등의 에피소드로 만들었다. 햇살합창단에 이어 뮤지컬 음악감독까지 맡은 유 감독은 “양색시가 무슨 노래냐며 손가락질하는 시선 때문에 노래 한번 시원하게 불러보지 못했던 이모들이 노래를 하며 달라졌다. 늘 숨어 살아왔던 이들이 가사를 음미하다 살아온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그것이 연극과 뮤지컬 공연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꺼야/ 때로는 보고파 지겠지/ 둥근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 날을 후회할꺼야”
패티김의 ‘이별’을 부르는 김숙자(72)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김 할머니는 가난과 부모의 학대를 피해 12살 때 가출했다. 가출 뒤 여러 곳을 전전하다 19살에 충북 진천에서 기지촌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살 때 “우리 영철이”를 만났다. 쿠바 사람이었고, 이름이 길어 그냥 영철이라고 불렀다. 할머니 나이 27살, 영철이는 20살 때였다. 2년 동안 같이 살던 영철이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김포공항에서 배웅하고 진천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할머니는 펑펑 울었다. 김 할머니는 “영철이가 준 선물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그중 선풍기는 최근에 고장나 버리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영철이와의 추억은 공연의 한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공연에 참여하는 할머니중 언론에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는 이는 김 할머니뿐이다. 처음 연극을 올릴 땐 망설이기도 했다는 김 할머니는 “한번도 내 인생이 다른 사람한테 의미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공연을 본 사람들이 감동받는 것을 보면서 나도 감동받았다”면서 “‘외화획득 역군’이라며 우리를 관리하던 국가가 이제는 나몰라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김숙자 할머니가 40년 넘게 간직하고 있는 미군 영철이의 노래하는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 뮤지컬 공연에서 이 테이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해외 주둔 미군기지의 불편한 진실을 담은 책 ‘오버데어’ 속 기지촌 여성들 사진. 도서출판 그린비 제공.
■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를 보는 다른 시선
한국 정부는 1950년대 초부터 외화벌이를 위해 미군 위안소를 조성하고 관리했다. 특히 박정희 정부는 더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개입했다. 성매매 행위가 불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매매 단속을 하지 않는 특정 윤락 지역을 지정해 성매매 행위를 방조했고,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명부에 등록시켜 성병을 관리했다.
한국전쟁 이후 극한 가난 속에서 생존을 위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러, 인신매매로, 기지촌에 유입된 여성들은 ‘양공주’ ‘양색시’로 비난받았다. 그러나 정부는 ‘달러벌이 산업역군’ ‘민간외교관’이라고 이들을 칭하며, 미군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기지촌정화사업’을 벌였다. 포주들은 부끄러움을 없애준다며 여성들에게 향정신성 약물인 ‘옥타리돈’을 먹였다. 이런 사실들은 할머니들의 증언록은 물론 국가기록원 자료 등에 모두 남아있지만 정부는 여지껏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을 외면하고 있다.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원장은 “일본군 위안부와 달리 미군 위안부 였던 기지촌 할머니들을 보는 세상의 시선은 좀 더 차갑다. 그래서 할머니들도 숨죽여 살았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길원옥 할머니가 2010년 어버이날에 만남을 가지면서 해주신 말씀이 큰 위안이 됐다”고 말했다. 당시 길 할머니는 “나도 일본군에 당했던 일이 내 잘못인 것 같아 얼마 전까지도 숨기고 살았어. 그런데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잘못인 걸 알게 됐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니까, 숨지 말고 힘내시게”라며 기지촌 할머니들의 손을 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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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25일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등이 ‘한국 내 기지촌 미군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 기자회견을 열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국가폭력 물증 나오며 소송, 실태 규명 법안 발의도
단순한 증언을 넘어 국가가 기지촌 여성에게 저지른 폭력의 책임을 입증할 직간접적인 물증들이 나오면서 기지촌 할머니들은 2014년 6월25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들이 소송을 돕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새움터 등이 공동으로 소송에 나섰다.
(관련기사: 미군 성병만 걱정한 정부…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라)
‘한국내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소송’은 지난 1월20일 1심 판결에서 일부 승소했다. 법원은 “국가가 성병 관리를 위해 이들을 격리시설에 강제수용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결하면서 “피해자 57명에 대해 500만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관련기사: 법원 “미군 기지촌 ‘위안부’에 국가가 배상해야”) 민변은 “수많은 입증자료 중 많은 부분이 판결에서 인정됐음에도 원고 일부승소 판결은 아쉽다”며 항소했고, 이달 31일 재판을 앞두고 있다.
2016년에 초연한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의 한장면. 김숙자 할머니와 영철이의 에피소드 장면이다.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늦었지만 기지촌 할머니들을 위한 법안도 발의됐다. 지난달 14일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미군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진실규명 및 생활안정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법은 국가 안보 명목상 정부가 실시한 기지촌 관리 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실태를 규명하고, 피해자 지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 의원은 “국가가 앞장서서 국민의 인권을 심대하게 침해하고, 사망에 이르게까지 하는 등 인권이 유린된 ‘미군 위안부’들에 대한 조속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기지촌 할머니들의 대부분은 가족들과 연을 끊고 홀로 살면서 영세민으로 나오는 지원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는 분들이 많다. 공연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걸고 있지만 올해는 제작비도 부족해
스토리펀딩(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14027)을 시작했다. 하지만 관심이 부족해 현재 목표액인 1천만원의 29%(291만원, 9월4일 마감)밖에 모이지 않았다. 우 원장은 “평택 미군기지는 일본군이 떠난 자리를 미군이 채운 것이다.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가 할머니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기지촌 할머니들의 뮤지컬 공연은 다음달 12일 저녁 7시30분 서울여성플라자에서 단 한차례 열린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