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영화인·네티즌 “최대피해자는 한국영화와 관객” 성토
“유신독재는 오래 지속된다”?
“박정희의 망령이 관객의 권리를 빼앗고, 상상력과 표현의 자유까지 침해하나?”
<그때 그 사람들> 개봉을 앞두고 법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낸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일부 받아들여 조건부 상영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네티즌과 영화계의 반발도 거세다. 앞서 실미도 북파공작 훈련병의 유족들이 영화 <실미도>의 제작사를 상대로 낸 신청은 법원에서 기각된 반면 박 전 대통령과 10.26사건을 다룬 <그때 그사람들>에 대해서는 국내 영화사상 최초로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 50부(이태운 부장판사)는 1월31일 다큐멘터리를 삽입한 영화 도입의 부마항쟁 시위장면과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장례식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추모하는 장면, 박 전 대통령의 장례식 장면에 대해 삭제 결정을 내렸다. 법원이 요구한 삭제장면은 박지만씨가 ‘명예훼손’으로 문제 삼았던 박 전 대통령의 사생활이나 ‘엔카’ 등 왜색 묘사가 아니다. 이 때문에 판결 배경에 ‘정치적 잣대’가 작용했다는 의혹이 남는다.
쿠데타로 집권해 18년간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었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아버지라는 점, 지지세력이 정치권 안팎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 등이 이번 결정의 ‘정치적 잣대’의 배경으로 지목된다.
법원,‘정치권 아우르기 vs 영화계 반발 무마’ 사이서 타협?
그렇다면 재판부의 이번 결정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법원의 결정은 가처분신청을 낸 박지만씨를 비롯해 정치권의 체면도 살리면서도 영화 내용에 결정적 수정을 하지 않도록 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봉합’이라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박지만씨는 이 영화가 아버지의 인격권을 훼손한다고 상영금지 신청을 냈지만, 법원은 이 영화가 블랙 코미디를 표방한 상업영화라는 점을 들어 영화 상영 자체를 금지시키거나 수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만 부마민주항쟁이나 고인의 장례식 등 다큐멘터리 장면에 대해서는 관객에게 영화가 허구가 아닌 실제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블랙코미디를 표방한 영화에 다큐멘터리를 삽입하면 결국 관객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사법부의 이번 결정은 한 영화에 대한 상영금지 가처분결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영화에 대한 판단이 관객이 아닌 사법부에 있음을 입증한 사안으로, 관객 수준은 감안하지 않은 채 사법부가 “특정인을 다뤘다”는 이유로 ‘검열’의 칼을 뽑아든 최초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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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부분의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 장면. MK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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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는 어떤가? 현직 대통령을 다룬 영화 <화씨 9.11>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명예훼손’ 등을 운운한 부시 지지자들의 불만 제기가 세계인의 우스갯거리로 다뤄졌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닉슨>은 촬영이 끝난 뒤 닉슨 전 대통령이 숨지자 그의 장례식 장면을 다큐멘터리로 추가해 개봉했고, 케네디 대통령을 소재로 한 <제이에프케이>나 <디데이13>은 실제 다큐멘터리 장면을 그대로 갖다 썼지만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제작사와 영화계, 네티즌들은 “이번 결정이 그간 한국사회가 힘겹게 이룩한 표현의 자유는 물론 한국영화의 발전을 심각한 상황으로 되돌리는 결정”이라며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임상수 감독 “정치적 판결로 인한 영화훼손 피해자는 한국의 모든 관객”
임상수 감독 역시 “정치적 판결로 인해 영화가 훼손당하는 이번 사태의 피해자는 나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관객”이라며 “세계적으로 수많은 영화가 다큐멘터리를 삽입하고 있는데, 이를 사실이라고 믿는 관념이야말로 예술에 대해 무지한 것 아닌가”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특히 젊은 시각으로 사회를 비판해 왔던 곽경택, 김상진, 김기덕, 류승완, 봉준호, 허준호 감독 등이 젊은 영화인이 주축이 된 디렉터스 컷은 “이번 결정은 명백한 사전검열로, 국민의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라며 “재판부의 오만한 결정에 맞서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이번 결정은 특정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제작될 때마다 당사자간의 법적 공방에 발목을 잡힐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최근 영화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실존 인물이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제작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현재 77년 불법건축물 철거반원을 살해한 박흥숙씨의 이야기를 담은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 3월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청연>이 한창 촬영 중이다. 이외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담은 <아리랑>과 언론통폐합 시대를 그린 , <그 여자 김추자>, <노근리 전쟁>, <삼청교육대> 등이 기획단계에 있다.
누리꾼 “절대로 삭제하지 마세요!” 한 목소리
누리꾼들도 법원 결정에 대해 ‘황당하다’, ‘표현의 자유 침해다’라는 반응이다. 이들은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 글을 남겨 “문제 장면을 삭제하지 말라”고 주문하거나 “박정희의 망령이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네이버>에 글을 남긴 네티즌 ‘everaffe’는 “영화사에서는 그냥 밀고 나가세요. 절대로 삭제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고, 네티즌 ‘bogosiperyo’는 “제작자가 화나서 당나귀에 무삭제판으로 뿌렸으면 좋겠다”며 법원판결에 항의할 것을 주문했다.
네티즌 ‘Bud White’는 “사법부의 뜻을 받아들여 제작사는 ‘<그때 그 사람들>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친부이신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절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박정희 죽이기 영화가 아니다’라는 부제를 달아 전국 모든 영화관에 뿌려 주기 바란다”고 요청하기도 했다.
누리꾼들은 또 사법부의 판결이 관객의 권리를 무시하고, 한국영화의 중흥기에 찬물을 끼얹을까 염려했다.
네티즌 ‘funntshops’는 “판단은 관객의 권리”라며 “볼 권리를 빼앗는 그게 바로 코미디요 독재다”라고 주장했으며, ‘dongbakse'는 “영화가 뭔지 문화에 대한 의식도 없는 것들, 이런 칼질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알기는 하나”며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리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네티즌 ‘dlrmsgod1’은 “자국의 현직 대통령을 비판한 <화씨9.11>이나 <볼링 포 콜롬바인> 같은 영화는 삭제는커녕 수작이라 평가받는다”며 “그러나 우리나라는 거꾸로 다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구나”고 씁쓸해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망령이 되살아나 과대 포장되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네티즌도 눈에 띈다.
“액션영화는 계속 때려 부수기만 하라고? 코미디에 눈물 신이 들어가면 법에 저촉?”
<인터넷한겨레> 한토마 논객 ‘각골명심’은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판결은 코미디영화는 계속 웃기기만 해야 하고, 액션영화는 계속 때려 부수기만 해야지 코미디에 최루장면이 삽입되면 법에 저촉된다는 얘기와 같다”며 “박정희를 예찬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애써 아름답게 포장해 잊으려 몸부림치는 것 아니면 치매환자”라고 꼬집었다.
네티즌 ‘qkekk21’는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지 알려면 ‘알몸 박정희’라고 검색하면 다 나온다”며 “1급 친일파로 태생은 조선이나 충성심은 쪽발이보다 더한다”고 이번 판결의 단초를 제공했던 박 전 대통령을 비꼬기도 했다.
한편 일부 네티즌들은 법원의 결정에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네티즌 ‘gomsole77’은 “아무리 영화라고는 하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인식되는 게 사실”이라며 “아직 역사에서 증명되지 않은 사실이 영화화함으로써 사실이 왜곡된다면 이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양의 탈을 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tokorozawa’는 “나라도 다른 사람이 부모님 이야기를 허구로 만든다면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라며 박지만씨의 문제 제기에 동의의 뜻을 밝혔으며, ‘fbwond’도 “표현의 자유 운운하는 자들이여, 너희 자신과 혈육지친을 대중매체를 통하여 욕보이려 했다고 해도 명예훼손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네티즌 ‘coolita’는 “남의 부모 죽는 것 희화화하는 것도 윤리의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영화로 만든 것을 가위질한다는 것도 시대에 맞지 않는다”며 어차피 판단은 관객의 이성이 할 문제라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