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중부 꽝남성(도) 디엔반현(군) 디엔즈엉사(면) 하미 마을에 자리한 위령비 모습.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비문 위에 연꽃 문양 대리석이 덮여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베트남 마을에 세워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위령비’를 두고 베트남전쟁 참전군인 단체와 현지 마을이 갈등을 빚고 있다.
베트남전 진실규명 활동을 하는 한베평화재단이 베트남 하미 마을 인민위원회 쪽에 확인한 내용을 종합하면, 지난 5월11일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 관계자가 베트남 하미 마을을 방문해 ‘도로 공사, 공원 건립 등을 지원할 테니 위령비를 철거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하미 마을은 베트남 중부 꽝남성(도) 디엔반현(군) 디엔즈엉사(면)에 자리한 마을이다. 1968년 2월22일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군인들의 학살로 주민 135명이 숨진 곳이다.
하미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는 2001년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건립 비용을 지원해 설립됐다. ‘숨진 한국군인과 주민들을 모두 위로하는 화해비’로 생각해 건립을 지원했다는 게 이 단체의 설명이다. 그러나 마을 유가족과 주민들은 참전단체가 잘못을 인정하고 민간인 희생자를 기린다는 전제 아래 위령비 건립을 받아들인 터여서, 한국군의 학살을 자세히 묘사한 비문을 남겼다. 설립 직후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 단체는 비문 삭제를 요구했다. 이에 하미 마을 유가족협의회는 비문을 지우는 대신 언젠가 다시 공개하겠다는 의미에서 연꽃 문양의 대리석으로 비문을 덮어뒀고, 참전 단체의 이름이 새겨진 팻말을 뽑았다. 그 후 위령비는 평화박물관 등 한국 시민단체로부터 개보수 비용 지원을 받아 현재까지 하미 마을이 있는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가 관리해왔다. 전우복지회는 현재 활동을 접었고, 복지회 출신 다수가 월남전참전자회에서 활동 중이다.
봉합돼 있던 갈등은 최근 참전자회 인사들이 하미 마을을 방문하면서 다시 불거졌다. 전우복지회가 위령비 건립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리던 팻말이 사라진 것을 보고 화가 난 이들은 마을 간부들에게 ‘위령비 철거’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의 한 간부는 “위령비는 우리의 역사다. 철거할 수 없다. 오히려 적절한 시기에 연꽃 문양 대리석을 걷어내고 비문 공개를 추진할 계획”이라며 이들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한베평화재단은 이런 경과를 전하면서 “위령비가 세워진 지 16년이 지난 지금 위령비를 없애라는 요구는 희생자와 유가족, 주민들에게 또다른 모욕과 상처를 주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참전자회 쪽은 ‘위령비’를 두고 마을 쪽과 논란을 벌인 것은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먼저 철거를 요구하진 않았다”고 반박했다. 단체 관계자는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먼저 우리에게 ‘도로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요구했다. 우리는 ‘팻말을 다시 세우고, (연꽃 대리석에 가려진) 비문을 없애야 지원해줄 수 있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미 마을 학살 50주기를 한 해 앞두고 ‘위령비’ 갈등이 재연하는 상황이 곧 한-베 상호 인식의 현주소를 말해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는 “위령비 갈등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도,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황금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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