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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총칼전쟁’보다 치열한 67년 ‘삐라 전쟁’

등록 2017-07-26 15:09수정 2017-08-04 16:31

디엠지박물관, 한국전쟁 정전 64주년 맞아 삐라전 개최
남북한 삐라 변천사 통해 시대 변화 엿볼 수 있어

삐라, 총·대포 대신 적 붕괴시키는 심리전의 총아
한국전쟁은 ‘삐라 전쟁’…남북한 1500여종 28억장 뿌려
종전 이후 체제 선전 활용…행복한 북 VS 자유로운 남
유엔군이 뿌린 안전보장증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유엔군이 뿌린 안전보장증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삐라는 총이나 대포 못지않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다. 총을 쏘지 않고도 적의 사기와 전투력을 붕괴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전쟁터에 나온 병사들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하고 가족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공포와 불안을 조성해 전의를 무너뜨린다. 삐라는 적군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가 결국 마음을 허물어 버린다. 그래서 ‘종이 폭탄’이라고 부른다.

7월27일은 유엔군과 북한군이 한국전쟁 정전협정을 맺은 지 64년째 되는 날이다. 강원도 고성에 있는 디엠지(DMZ)박물관은 이를 기념해 연말까지 ‘벌거벗은 심리전의 첨병, 삐라!’전을 개최한다.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뿌려진 2000여종 중에서 엄선한 300여장의 삐라를 통해 남북한 삐라의 변천사를 짚어보고 현대사의 상처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기획됐다.

한국전쟁은 전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리전이 치열했다. 당시 남북한 합쳐 1500여종의 삐라를, 유엔군은 25억장, 북한군은 3억장 뿌렸다. 대부분 삐라는 엽서보다 조금 큰 36절지 크기였는데, 이 정도 양이면 한반도를 수십 번 덮을 수 있는 분량이다. 유엔군은 1950년 6월28일 이후 매주 2백만장이 넘는 삐라를 뿌렸다. 최고 절정기에는 매주 2천만장이 넘었다. 당시 프랭크 페이스 미 육군부 장관의 명령은 “적을 삐라에 묻어라”였다. 이런 이유로 한국전쟁은 ‘삐라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 한국전쟁 기간 : 남북한 합쳐 최소 28억장 뿌려

미국 극동사령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3일 만인 1950년 6월28일 처음으로 1200여만장을 뿌렸다. 국군의 항전을 격려하면서 유엔군이 한국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심리전은 더욱 가열됐다. 유엔군은 같은 해 7월17일부터 신문 형식의 뉴스 삐라인 ‘낙하산 뉴스’를 적진에 뿌렸다. 유엔군 삐라는 대부분 일본 도쿄에 있던 미 극동사령부 심리전 부대 디자이너들이 만들었다. 한국어·영어·중국어·러시아어 등 4개 국어로 제작됐다. 한국전쟁이 국제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전세가 급박해지자 김포 공군기지에서도 만들었다. ‘코주부’ 김용환, ‘고바우’ 김성환 등 당대 유명 만화가와 화가들의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북한군도 전쟁 초기 사기 진작을 위해 삐라를 대량으로 뿌렸다. ‘적들을 일층 무자비하게 소탕하라’ ‘부산과 진해는 지척에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삐라로 적극적인 심리전을 펼쳤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일반 삐라, 뉴스 삐라, 안전보장증 등이 제작됐다.

뉴스 삐라는 일반 삐라보다 큰 종이에 신문 형식으로 뉴스를 담았다. 유엔군이 제작한 뉴스 삐라는 ‘자유세계주보’라는 제목의 신문 축소판 형식으로 한글과 중국어로 만들어 뿌렸다. 승리할 것으로 굳게 믿었던 북한군과 중공군을 흔들기 위해서였다.

유엔군이 만든 안전보장증 삐라는 귀순자의 안전보장을 증명하는 내용을 담았다. ‘안전통행증(Safe Conduct Pass)’이라는 제목과 함께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유엔군과 한국군에게 “이 증명서를 들고 귀순하는 적군을 명예로운 포로로 대하라”는 내용을 함께 담고 있다. 법적으로 권리가 보장된 문서 같은 느낌을 줘 중공군과 북한군들에게 효과가 컸다고 한다.

북한군이나 중공군이 제작한 안전보장증도 형식은 비슷했다. 유엔군에게 ‘투항’이라는 영어 발음이 적혀 있는 삐라가 뿌려졌다. 실제로 포위 당한 유엔군들이 안전보장증을 들고 투항해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보급 사정이 좋지 않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만든 삐라도 있다. 담배를 말아 피울 수 있는 종이로 삐라를 만들어 ‘도망하라 유엔쪽으로’라는 문구를 넣었다. 북한군이 삐라를 주워 담배를 말아 피우는 데 착안해 아예 담배 마는 종이를 삐라로 만들어 뿌린 것이다. 담배를 말면서 한번 이라도 볼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했다. “제군은 어서 유엔군으로 넘어와 전쟁없는 데서 맘편히 즐겁게 그 좋은 담배를 피우라”고 귀순을 권유하고 있다.

전쟁이 길어지자 양 쪽은 향수를 불러일으켜 투항을 권유하는 삐라를 뿌렸다.

유엔군은 중공군이 개입한 뒤부터는 고향에서 빈 밥그릇을 들고 굶주림에 지친 가족들의 모습이나 전쟁터에서 사망한 중공군의 모습과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 등을 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를 상상하게 했다.

중공군이 유엔군 진영에 뿌린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중공군이 유엔군 진영에 뿌린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중공군도 가만있지 않았다. 책상에 엎드린 여성의 모습과 함께 “당신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상상할 수 없어요”라는 달콤하고 애절한 문구가 들어간 삐라를 뿌려 유엔군의 향수를 자극했다. 아내나 연인의 불륜을 주제로 한 삐라도 뿌렸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귀국했더니 자신을 기다릴줄 알았던 아내나 연인이 침대에서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그린 삐라는 유엔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서울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서울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 1960~1970년대 : 행복한 북한 VS 자유로운 남한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1960~1970년대는 이념 대립 속에서 체제 경쟁에 중점을 둔 삐라를 만들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잘 살고 행복한 나라라는 사실을 부각했다. ‘사회주의 낙원으로 오라’며 체제의 우월성을 자랑했다.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 북한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 등을 담았다. 선정적인 내용으로 남한의 권력자들을 희화화하는 삐라도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배우 윤정희씨와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을 담은 삐라가 대표적이다. 유신독재를 상세하게 비판한 내용, 군인들이 총칼로 농민을 협박하는 모습 등을 담은 삐라도 많았다.

남한 방송을 들으라고 권유하는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남한 방송을 들으라고 권유하는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1970년 중반 이후 남한에서 보낸 삐라는 해수욕장에서 가족들이 여유롭게 피서를 즐기는 모습, 풍년을 맞아 환하게 웃고 있는 농부, 경부고속도로 개통, 공업의 발달로 삶의 질이 향상된 모습 등을 담았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삐라를 만들었다. “생활이 풍족한 한국의 인민들은 수시로 백화점을 찾아 취미에 맞는 물건을 산다. 살림이 풍족하게되니 인민들은 각종 귀금속을 장만도 한다”는 사진설명을 곁들였다.

경제적 풍요 외에 자유를 강조하기도 했다. 정부는 영화 제작 현장 사진을 담은 삐라로 남한 영화는 주제 선택과 내용 묘사에서 아무런 정치적 제약을 받지 않아 인민이 원하는 작품을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선전했다.

“라디오의 다이야루는 어데다 쓰는 것입니까?” 남한에서 만든 라디오가 그려져 있는 삐라는 듣고 싶은 방송을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지 묻는다. ‘남한 방송을 듣고 싶은 호기심이 없는지, 듣고 싶은 방송을 못 듣쿁다면 라디오 다이얼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남한 방송 청취를 권유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당이 결혼 상대자 선택에 간섭하지 않는다.” 남한에서는 결혼식을 올리는 당사자들이 신식과 구식 등 자유롭게 선택하고 정부나 당의 간섭을 받는 일이 절대 없다고 선전하는 삐라도 있었다.

■ 1980~1990년대 : 지상낙원 VS 자유세계

1980년대는 남북 모두 권력기반 구축과 내부 역량 강화에 집중한 시기다. 남북한은 서로 최고권력자를 비방했다. 이때부터 남한 삐라는 수영복 차림의 여성 연예인 사진을 유혹의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북한은 ‘지상낙원’, 남한은 ‘자유세계’를 선전하며 서로 귀순을 유도했다.

남한은 귀순자를 내세워 행복하게 살고 있고 북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우를 받는다는 내용으로 월남을 유도했다. 북한도 비무장지대에서 월북한 군인들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담은 삐라로 맞불을 놓았다.

남한은 당시 톱여배우들을 내세웠다. 대부분 수영복 차림으로 ‘월남하면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할 수 있다’는 등 자극적인 문구로 북한군을 ‘유혹’했다. 대표적으로 “가위로 잘라 간직하십시오”, “비행기 몰고 5분, 자유대한의 품으로 오세요. 불같이 뜨거운 정열로 나를 사랑해줘요”, “용감한 당신이 나를 가질수 있어요, 서울의 애인이라고 불러주세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이 뿌린 삐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대통령이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모습은 거의 빠지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독재 치하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는 삐라와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의 실상을 보도한 해외 언론의 사진을 실었다.

미인계를 활용한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미인계를 활용한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남북한은 1991년 12월 전단·방송을 동원한 비방을 금지하기로 한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서명을 계기로 삐라 살포는 줄기는 했으나 내용은 더욱 원색적으로 변했다.

북한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여배우의 침실 사진을 합성해놓고 ‘김영삼 패륜아’라는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체제 경쟁에서 뒤진 북한은 삐라가 심리전 수단으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살포량을 줄였다. 소련 붕괴 이후 연쇄적으로 이어진 동유럽 사회주의 몰락이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체제 선전 내용이 더 이상 남한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북한이 뿌린 남한 최고 권력자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삐라. 디엠지박물관
북한이 뿌린 남한 최고 권력자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삐라. 디엠지박물관

■ 2000~2010년 : 남, 21세기형 비닐 삐라 VS 북, 남한 확성기에 반발해 삐라 살포 재개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 이후 상호 비방 중단에 합의하면서 양쪽 정부의 심리전은 중단됐다. 남한은 달랐다. 민간단체들이 21세기형 삐라를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자유북한운동연합과 기독북한연합 등 탈북자단체들은 종이 대신 비닐을 택했다. ‘비닐 삐라’라고 불린다. 북한의 독재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탈북체험기, 삼대 세습 비판, 최고 권력자의 사치스런 생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비닐 삐라에는 미화 1달러 지폐, 남한의 인기 공연, 드라마 등이 담긴 디브이디(DVD)나 유에스비(USB) 등을 넣어 보내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내용의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내용의 삐라. 디엠지박물관 제공

북한은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 2000년 이후 사라졌던 삐라 살포를 재개했다.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우리 군이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한 데에 따른 조치였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전쟁미치광이 청와대 악녀를 단호히 처단하자”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적힌 삐라는 박 대통령을 유신 모자를 쓰고 파쇼폭압을 자행하는 여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도움주신분 : 노연수 디엠지박물관 학예사, 진용선 아리랑박물관장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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